“아직 전쟁 중인데…” 우크라 돌아가는 피란민들
향수병·외로움에 8명 한국 떠나
“전쟁보다 더 버티기가 힘들어”
자체쉼터·협동농장 있지만 ‘한계’
“피란민 위한 심리치료 등 필요”
2023년 10월 18일(수) 18:23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중 한국으로 탈출한 박에릭(가운데)씨가 향수병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최근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려인마을 제공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난해 광주고려인마을의 항공권 지원으로 국내로 입국한 피란민들이 향수병 등을 호소하며 한국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고려인마을 관계자들은 ‘쉼터·협동 농장 등을 자체 운영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며 심리치료 등 행정당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18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피란민 박에릭(72) 씨가 지난 12일 우크라이나의 고향 마을을 찾아 지난 1년 6개월 동안 머문 고려인마을을 떠났다. 그는 전쟁 발발 이후 아내와 함께 폴란드를 거쳐 지난해 4월 광주에 도착했다. 위험에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들 부부는 한국에 있으면서 극심한 향수병에 시달려야 했다.

1년이 넘는 기다림에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씨는 결국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는 뜻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한국을 떠나 독일 큰딸 집에 머물고 있는 박씨와 그의 아내는 조만간 우크라이나 비행길에 오를 예정이다.

실제 고려인마을에는 박씨의 경우처럼 귀향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전쟁이 발생해 삶의 터전을 그대로 놓고 온 피란민들은 녹록지 않은 국내 생활로 인해 고향을 더욱 그리워하게 됐다.

우크라이나 미콜라이브에서 지난해 4월 국내로 입국한 안엘레나(42)씨는 “우크라서 튤립 농장을 운영했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의 폭격 등으로 농장과 집을 모두 버리고 떠났다. 당시에는 ‘목숨이라도 건지자’는 생각이 강했다”며 “고려인마을의 도움으로 감사히 월곡동 인근에 단칸방을 꾸렸지만, 갑작스럽게 오게 된 이곳에서 서툰 한국말과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는 생각보다 큰 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현지 농장 생활이 정말 그리워지곤 했다. 어떨 때는 ‘전쟁보다 더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회고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른들만의 몫이 아니다. 함께 온 어린이들도 가족·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했다.

가족과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피난 온 김안드레아(11)군은 “지난해 10월 엄마·아빠·외삼촌·할머니·누나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영문도 모른 채 (마을서) 지내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구와 친척들이 너무 보고 싶다. 여기서는 친구 사귀는 것조차 힘들다. 한국말이 서툴러 학교도 적응하는 게 어렵다. 가끔 평생 우크라이나에 가지 못할까 봐 우울해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서 진행된 ‘제11회 고려인의 날’에 참석한 김안드레아군(오른쪽). 정성현 기자
올해 고려인마을에서는 8명의 피란민이 우크라이나 귀향길에 오른 것으로 파악됐다. 아울러 타 국가 및 기타 이유로 떠난 피란민과 앞으로 떠날 피란민 수 또한 많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자체적으로 피란민 정착을 위해 쉼터와 협동 농장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들이 고향을 잊고 새 출발을 하기에는 재정·규모 등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마을 협동농장은 지난 2월 광산구 새마을회로부터 농지 3000평을 무상 임대 받아 토종닭·친환경 농산물 등을 재배·수확하고 있는 '집단 농장'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현지의 드넓은 농지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다 보니 되레 고향 생활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게 마을의 설명이다.

아울러 광주시와 광산구에서 피란민들을 위한 심리적 지원 등이 없다는 점도 고려인마을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지난해 2월부터 지금까지 약 900명의 피란민이 국내로 입국했다. 마을은 이들의 안정과 조기 정착을 위해 임시 거주지인 쉼터를 운영하고 협동농장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와 향수병을 치유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며 “이제는 피란민들의 ‘마음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심리·상담 치료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총칼이 난무하는 곳에 다시 제 발로 걸어가겠나. 마을 예산·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행정당국의 지원과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김광진 광주문화경제부시장은 지난 15일 ‘제11회 고려인의 날’ 행사에서 “고려인마을은 고향을 떠나 광주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안식처다. 시는 이들의 생활에 도움을 줘야 할 의무가 있다”며 “이들이 고향에서 느끼고 지내왔던 것들이 광주에서도 ‘당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광주시도 마땅한 역할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