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마음의 빚을 진 섬… 동학과 항일의 역사 깃들어
●완도 소안도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애국지사의 고장
섬주민 365일 집집마다 태극기 내걸어
친일파 이기용에 토지소유권 반환 투쟁
270명으로 소안학교 문 열어… 민족교육
천연기념물 상록수림 등 풍광도 뛰어나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애국지사의 고장
섬주민 365일 집집마다 태극기 내걸어
친일파 이기용에 토지소유권 반환 투쟁
270명으로 소안학교 문 열어… 민족교육
천연기념물 상록수림 등 풍광도 뛰어나
2025년 05월 15일(목) 15:11 |
![]() 가학리에 세워진 소안도 항일운동 기념탑. 섬사람들의 항일정신이 오롯이 밴 옛 소안학교 자리에 세워졌다. |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10여㎞ 떨어져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보길도와 노화도를 옆에 두고 있다. 배는 화흥포항에서 탄다. 여객선 이름도 ‘대한민국만세’에서 따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로 붙여져 있다. 화흥포를 출발한 배는 노화도 동천항을 거쳐 소안도까지 50분 만에 데려다준다.
![]() 항일의 섬, 해방의 섬 소안도 표지석. 소안항에 설치돼 있다. |
그 가운데 90여명은 지금 우리 정부로부터 애국지사, 독립운동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도 21명에 이른다. 섬주민이 1년 365일,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거는 이유다. 이목리 해양공원 호수에 태극기도 띄웠다. 태극 문양은 양식장에서 쓰는 부표로 만들었다.
소안도의 항일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맹선리 짝지에 막사를 짓고 고기 잡던 일본사람을 섬주민들이 쫓아냈다. 동학혁명 땐 소안도가 농민군 훈련소였다. 섬에 접장을 둘 정도로 동학을 믿고 따르는 주민이 많았다. 1894년 12월 동학 지도자 이강욱, 나민홍, 이순칙 등 7명이 이 섬에서 죽임을 당했다.
1909년엔 당사도 등대를 습격, 일본인 간수를 처단했다. 일본이 우리 수산물과 쌀·면화 등을 수탈해 갈 목적으로 세운 등대를 부숴버린 것이다. 이준화 등 6명이 등대를 습격, 일본인 4명도 처단했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1910년 8월29일) 이후 항일운동은 더욱 활발했다. 1909년부터 13년 동안 친일파 이기용에 넘어간 토지소유권 반환 요구 투쟁에서 승리했다. 1913년엔 서당을 통·폐합시켜 신식 교육기관인 중화학원을 설립했다. 비밀 항일단체와 배달청년회도 결성했다.
1919년 3·1운동에도 일찍 참여했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이었다. 소안도 주민 송내호, 정남국 등이 주도해 3월15일 완도읍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만세시위(4월1일)보다도 보름이나 빨랐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100여년 전의 일이다.
![]() 소안도 주민들이 설립한 사립 소안학교. ‘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섬주민의 인식이 배어 있는 곳이다. |
주민들은 1923년 소안학교를 세우고 학생 270명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일본이 세운 공립학교엔 일본인 자녀 등 30여명이 다녔다. 소안학교에는 완도·해남은 물론 멀리 제주에서까지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 소안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이시완은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그만두고 교사로 일했다.
소안학교는 일제의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일본)국경일에 일장기를 달지 않는다, 국상에도 조의를 표하는 상장(喪章)을 붙이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를 양성한다는 등의 이유로 강제 폐교 조치했다.
‘떠난다 떠나간다 나는 가노라/ 새원의 꽃 동무를 남겨두고서/ 삼추에 맺은 마음 굳고 깊건만/ 쇠뿔을 못 이겨서 나는 가노라/ …(중간 생략)… 소안의 뭉게뭉게 피는 꽃송이/ 한 말씀 드리노니 새겨 두시오/ 아무리 악풍폭우 심할지라도/ 임 향한 일편단심 변치 마시오.’ 이시완이 글을 쓰고 음률을 붙인 ‘이별가’의 일부분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즉시 복교운동에 나섰다. 섬주민 1000가구 가운데 800가구가 참여했다. 일제 경찰로부터 보안감시 대상인 ‘불령선인’으로 불리며 온갖 감시와 고초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 섬에 남은 사람들은 잡혀간 이웃을 생각하며 겨울에 이불을 덮지 않았다. 일제에 부역한 사람한테는 불씨도 나누지 않았다. 경찰과는 말도 하지 않는 불언동맹도 실천했다.
소안도 항일운동 기념탑이 비자리에 처음 세워졌다. 섬사람들이 직접 다듬었다. 검정 돌은 일제 암흑기, 흰 돌은 광복된 세상을 상징한다. 가학리에 새 기념탑과 기념관도 들어섰다. 섬사람들의 항일정신이 오롯이 밴 옛 소안학교 자리다. 기념관에는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21명의 흉상과 함께 존영이 모셔져 있다. 등대 습격사건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만들어져 있다.
![]() 맹선리 상록수림. 수령 200∼300년 된 후박나무 등 상록수 240여 그루가 해안선을 따라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
섬의 둘레길도 단아하다. 대봉산 동쪽을 끼고 도는 북암과 비자리를 잇는 길이 멋스럽다. 오래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길이다. 1980년대 우회도로가 개통되면서 묵히다시피 한 길을 다시 단장했다. 흔한 나무 데크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직접 돌을 다듬고 흙을 다졌다. 아부산 정상과 거북바위로 가는 숲길도 오붓하다. 섬 주변 풍광과 함께 바둑판처럼 깔린 전복양식장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 소안도 이목해양공원에 있는 물 위의 태극기. 양식장에서 쓰는 부표로 호수에 태극 문양을 만들어 띄웠다. |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