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매일이 지옥… 전우 시신 넘어 또 돌격"
●6·25 75주년…참전유공자 강이원씨
19살에 나라 지키려 자원 입대
고지 점령하고 뺏기고 매일 반복
50년 넘게 봉사활동·장학금 전달
“후손들 참전 유공자 잊지 않길”
19살에 나라 지키려 자원 입대
고지 점령하고 뺏기고 매일 반복
50년 넘게 봉사활동·장학금 전달
“후손들 참전 유공자 잊지 않길”
2025년 06월 25일(수) 18:21 |
![]() 강이원 6·25참전유공자회 장성군지회장. 장성군 제공 |
6·25 전쟁 75주년을 맞는 25일, 참전유공자이자 6·25참전유공자회 장성군지회장인 강이원(91)씨는 지난 1953년 5월 치열했던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강씨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 후 2년 뒤인 1952년 19살의 어린 나이로 자원 입대했다.
친구들이 ‘가면 무조건 죽는다’고 말렸지만 가족이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했던 아픈 기억이 있던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제주도로 이동해 4개월간 훈련을 받고 22사단 67연대 소속으로 최일선인 철원 백마고지에 투입됐다. 강씨는 백마고지 전투를 한 단어, ‘하루살이’로 표현했다.
강씨는 “최일선에 참여해 웃을 새도 없고 고지를 점령하면 뺏기고 다음날 다시 점령하고를 반복했다. 사방에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고 전우가 쓰러져도 놔두고 그저 앞으로 돌격했다”면서 “고지를 한 번 내려갔다 올 때마다 소대원 절반이 사라졌다. 지옥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소쿠리에 있던 작은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인민군뿐만이 아닌 배고픔과도 사투를 벌였다”며 “매일, 매순간, 전우들의 시체를 넘었고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총을 쏴야했다”고 회고했다.
강씨는 좌측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돼서야 백마고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강씨는 “총상을 입고 정신을 잃던 순간에도 바로 옆에서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전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면서 “당시 너무 정신이 없어 내가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지도 몰랐지만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나야 운이 좋아 용케도 병원에 계속 남아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병원에 있던 다른 이들은 치료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퇴원해 다시 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며 “6·25전쟁은 매일이 지옥같은 하루였다”고 덧붙였다.
강씨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50여년간 호국 보훈활동을 이어왔다. 광주·전남 지역 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 6·25전쟁 알리기 교육 등 꾸준히 봉사활동을 실천하며 지역 인재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2년 다니다 그만뒀던 기억이 있다. 나처럼 배움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등을 전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씨의 바람은 후손들이 6·25참전 유공자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강씨는 “참전영웅들과 당시 훈련했던 제주도에 갔더니 6·25 모자를 보고 서울에서 관광 온 사람들이 우리들 덕분에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다 났다”며 “3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박수와 함께 고마움을 표현하자 가슴이 뭉클하고 정말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나를 비롯해 참전유공자들이 다 나이가 들었고 숫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바라는 건 후손들이 우리를 잊지 않고 그저 감사하다는 말이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강씨는 75년전 당시를 떠올리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참혹하고 비극적인 전장을 직접 겪어보니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뿐이다”며 “이념의 갈등 앞에서 목숨을 잃고 양쪽이 피해만 가득한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정승우 기자 seungwoo.je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