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은 그리 알려진 마을이 아니다. 독특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국보나 보물 같은 문화유산도 없다. 큰 도로의 나들목이나 교차로가 지나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속이 꽉 찬 마을이다. ‘알토란’ 같다. 일본에 맞선, 항일의 ‘대표주자’로 불릴만한 곳이다. 역사도 깊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도 들렀다. 1597년 8월 20일(양력 9월 30일), 회령포에서 배를 타고 울돌목으로 가는 길이었다. 뱃속이 요동을 치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구역질과 구토가 계속됐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날마다 강행...
2023.08.31 15:04대황강변 석곡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은 보성강을 건넌다. 아직도 어두운 이른 새벽, 강변의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계절은 초가을이지만, 강바람은 초겨울이었다. 사방이 어두운 탓에, 어디가 강이고 땅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횃불을 밝힐 수도 없는 처지다. 언제 어디에서 일본군의 정탐꾼이 엿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곡나루에서 배를 타고 대황강을 건넌 이순신은 어둠 속을 달렸다. 목적지는 창촌에 있는 부유창(富有倉)이었다. 이순신은 정찰을 다녀온 군관 이형립을 통해 이복남의 부대가 부유창으로 이동한 사실을 이미 알고 ...
2023.08.17 17:02‘붕어빵에 붕어 없다’고 했던가? 불교인데, 석가모니 부처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일원상’이 있다. 일원상은 세상의 모든 진리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속이 텅 비어 있지만, 가득한 우주만유(宇宙萬有)를 상징한다. 하지만 허상일 뿐,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다. 영광 길용마을로 가는 길이다. 길용마을은 이른바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알려져 있다. 원불교의 태 자리다. 원불교를 창시한 대종사 박중빈이 태어난 곳이다. 박중빈이 큰 깨달음을 얻고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영산성지로 가는 도로의 이름도 ‘성지로’로 붙여져...
2023.08.03 15:16산으로 간다. 울창한 숲그늘이 한 올의 햇볕도 허락하지 않는 지리산이다. 그 중에서도 무더위를 피하기에 좋은 피아골이다. 장쾌한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곳이다. 귓속은 물론 뼛속까지 서늘하게 해준다. 피아골은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이 품고 있다. 임걸령에서 시작된 물이 지리산 골골을 거쳐 섬진강과 만난다. 장장 15㎞가 넘는 길고 깊은 계곡이다. 속을 헤아릴 수 없는 연못, 집채만한 바위와 어우러진 풍치도 빼어나다. 녹음 우거진 여름은 말할 것도 없고 봄과 가을?겨울 언제라도 좋은 골이다. 피아골은 ...
2023.07.20 14:36마을 어르신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마을회관 앞으로 깔린 레드카펫을 걷는다.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흥겨운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춘다. 길지 않는 레드카펫을 돌고, 또 돈다. 한복을 입은 어르신도,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웃으며 즐거워했다. 적막감이 감도는 산골이 왁자지껄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의 한 페이지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지난 6월 중순, 곡성군 오산면 관음마을에서 열린 ‘한복 입고 이팔청춘 마을 패션쇼’에서다. 패션쇼에는 서울에서 유학 온 학생의 학부모와 청년 활동가들이 도우미로 참...
2023.07.06 16:34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은 한옥이 멋스럽다. 바다와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바다가 그리는 그림도 수시로 바뀐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인가 싶더니, 금세 바닷물이 밀려든다. “멋지죠? 전망도 좋고요. 저의 집이자, 소꿉놀이 터입니다. 찾아와서 하룻밤 묵는 손님들도 좋아해요. 함평만 풍경이 이렇게 근사한지, 예전엔 몰랐다면서요.” 주포마을에서 ‘윤슬한옥’을 운영하는 김미정 씨의 말이다. 윤슬한옥은 한옥펜션이다. 손님에 내어주는 방은 모두 5개. 화장실과 욕실 등 내부가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다. 온돌방이 있고...
2023.06.22 15:28기억(記憶)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도, 풍경도, 건물도 매한가지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기억을 한다.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남는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그 위에다 다른 생각을 입히고 각색도 한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극히 정상이다. 뜻깊은 일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표지석도 세운다. 기록관 같은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표지석이나 건축물은 부침을 겪기 일쑤다. 한때 ‘특수’를 누리다가, 손가락질을 받는다.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담양 성산마을을 생각한다. 40여 년 전, 1982년 3월 ...
2023.06.08 15:44별난 섬이다. 섬을 몇 바퀴 돌아도 강아지 한 마리 만날 수 없다. 닭이나 병아리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나 지천인 무덤도 전혀 없다. “예부터 내려오는 당제와 연관됩니다. 섬이 다 그렇지만, 쑥섬사람들은 전통에 대한 믿음이 강했어요. 당제를 지내러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되돌아와서 목욕재계를 했어요. 개와 닭의 울음소리도 신성한 제사에 방해가 된다고 기르지 않은 겁니다.” ‘쑥섬지기’ 김상현 씨의 말이다. 마을 뒤편 당산에도 아무 때나,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섬에 무덤이 없는 것도 매...
2023.05.25 13:57큰 기둥이 하나 보인다. 언뜻 굴뚝 같은데, 굴뚝치고는 너무 굵다. 첨성대 같다. 많은 양의 곡물이나 시멘트를 저장하는 사일로(silo) 같기도 하다. 둥근 구조물의 왼쪽과 오른쪽의 모양도 똑같다.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굴뚝도, 첨성대도 아니다. 급수탑이다.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시설이다. 오래 전, 증기기관차가 달릴 때다. 증기를 동력으로 쓰는 열차는, 물이 떨어지면 멈출 수밖에 없다. 하여,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물을 공급하는 시설을 뒀다. 기관차가 역으로 들어오면 한쪽에선 삽...
2023.05.11 10:50이팝나무꽃이 피고 있다. 연둣빛 이파리 사이로 피어난 꽃이 순백색이다. 얼마나 순결하고 아름다운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봄날의 신록을 본 수필가 피천득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다. 남도에는 ‘명물’ 이팝나무가 많다. 순천 평지마을에 수령 400년 된 이팝나무가 있다.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광양 유당공원의 이팝나무도 천연기념물이다. 순천 평촌리에도 400살 된 이팝나무가 있다. 장흥 용곡리에는 수령 370년 된 나무가 있다. 해남 맹진리엔 수령 300년 된 이팝나무가 있다. ...
2023.04.27 14:49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앞서 반긴다. 수백 살은 들어 보인다. 나무 그늘엔 모정이 들어앉아 있다. 오괴정(五槐亭)이다.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 아래 정자다. 살랑이는 봄바람을 만끽하기에 좋다. 여름날엔 무더위를 식혀주는 쉼터로 맞춤이다. 농사일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두 그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이 나무 아래에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어요.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당산제를 지내고, 건강과 행복을 빌었습니다. 그때가 좋았어요. 맛있는 ...
2023.04.13 14:37목포에 양동(陽洞)이 있다. 서양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양리’ ‘양동’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목포부 양동이 됐다. 2007년에 대성동과 목원동으로 나뉘었다. 목포시의 여러 법정동(法定洞) 가운데 하나다. 양동의 상징이 양동교회다. 선교사 유진벨이 1897년에 세웠다. 반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목포는 뭍과 섬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기에 좋았다. 때맞춰 목포항도 열렸다. 교회는 양동의 언덕에 천막을 치고 시작됐다. 목포는 물론 전남 개신교의 시작이었다. 자연스레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가 됐다. 양동교회는...
2023.03.30 15:54빈 수레가 요란하고, 속에 든 것 없는 사람이 거드름을 부린다. 아는 것 많은 사람은 결코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속이 꽉 찬 사람은 부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어디서나 빛이 나는 법이다. 지역도 매한가지다. 인지상정이다. 장흥 만수마을은 속이 꽉 찬 마을이다.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알려진 마을이 아니다. 70년 가까이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면서 결코 요란을 떨지 않았다. 알아달라고 티를 내지도 않았다. 내 식구 밥그릇도 챙기기 버거운 시절부터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해왔다. 소리?소문 없이 우...
2023.03.16 17:26말이 많은 세상이다. 내뱉는 말도 거칠고 격하다. 행동은 따르지 않는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지적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요즘 정치인과 일부 지식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매천 황현(1855∼1910)이 떠오르는 이유다. 황현은 매사에 진지하고 엄격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한 문장가로, 시대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가로 살았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의 선비로 살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했다.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졌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며 목숨을 ...
2023.03.02 15:12타임머신을 타고 선사시대의 흔적을 찾아간다.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지동마을이다. 지동마을은 만지산과 조봉산, 안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10여 가구 30여 명이 살고 있는 산골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마을 주변에 지동제 등 큰 저수지가 있어 물 걱정도 없다. 아주 오랜 옛날,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자로 연못 지(池)를 써서 ‘지동(池洞)’이다. “괸돌바위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연못에서 물놀이를 하고, 괸돌바위에 앉아 낚시질도 즐겼겠죠. 연못이 있는 마을이라고 ‘못골’로...
2023.02.16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