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봉양사, 화순 도원서원_신재 최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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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연의 문향
광양 봉양사, 화순 도원서원_신재 최산두
봄을 맞이하기를 열네 번, 겨울을 보내기를 열네 번,||유배지에서 이어진 도학. 절의. 문장들
  • 입력 : 2019. 01.24(목) 13:46
  • 편집에디터

백옥연 광주 광산구 문화재활용팀 팀장 광산구 역사문화전문위원

"여보게, 이제 나갈 시간이 되었네. 오늘이 내 삼오 젯날이라 먹을 것이 푸짐할 거야"

"미안허이,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셔서 내 나갈 수가 없네. 자네나 귀한 음식 대접 잘 받고 오시게나"

사람이 자기 삼오제에 나가서 젯밥을 얻어먹을 수는 없고, 귀신이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대화는 귀신들끼리 주고받는 바람결의 말이다.

"아니 누가 왔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길래 걸신 들려 죽은 자네가 젯밥을 마다하나?"

"허허 천기누설이라 말하면 아니 되네. 훗날 조선의 어둠을 밝힐 한림학사가 오셨으니 그리 알아두게"

소년은 글을 배우러 매일 십리 길을 왕복했다. 광양 옥룡 하운마을에서 숲골까지, 소년에겐 먼 길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해질 무렵 돌아왔다. 한번 책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동무들 떠난 서당에 홀로 남아 있곤 했다. 하루는 밤늦도록 공부를 하다가 길을 나서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소년이 목동 고갯마루를 넘을 무렵 앞이 안보일 정도로 세차게 퍼부었다. 소년은 비를 피하기 위해 움막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은 덕발이었다. 덕발은 '출빈(出殯)'과 같은 말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시신의 수분이 빠지도록 집 밖 빈소에 내어놓는, 말하자면 사체 임시보관소쯤 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소년은 걸신 들려 죽은 귀신 방에 들어간 것이고, 그 귀신이 훗날 조선의 문장으로 '호남삼걸'이라 불리는 귀인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소년의 착각적인 경험이 여러 입을 거치면서 전설처럼 확대 재생산되었을 것이지만, 그의 유년시기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1483∼1536).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가 탯자리인 그는 어머니 청주 한씨가 백운산과 북두칠성이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간 태몽을 꾸어 산두(山斗)라 이름 지었다 한다. 또 하나, 학문에 관한 그의 사생결단적 근기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으니, 15세에 이르러 외부왕래를 일체 끊고 '백류동' 계곡의 굴속에 들어가 오직 학문에 정진한 것이다. 그가 '통감강목'(중국 남송의 주희가 지은 역사책으로 전편 59권) 등 80권을 수천 번 통독하고 2년 만에 밖으로 나오니, 초목의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문자로 보이더라는 것이다. 광양읍에서 북으로 30리쯤 떨어진 백계산 기슭의 백류동에 가면, 그 석굴이 '학사대'라는 정자 밑에 지금도 있다.

최산두는 평안북도 회천에서 순천시로 이배(移配) 되어온 김굉필 선생을 '옥천사'로 찾아가 제자가 된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비상의 첫 날개를 폈다. 중종 8년(1513)에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훈구파 대간들은 최산두가 한미한 집안의 출신으로 홍문록에 합당하지 않는 인물이라며 명단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세 번이나 배척했다. 말하자면 '금수저'들의 갑질인 셈이다. 그러나 사신은 "최산두가 한미하다고는 하나 기상이 씩씩하고 글이 넉넉하니 어찌 옥당(홍문관)에 합당하지 않겠는가!"라고 논박했다. 최산두의 시조는 전주 최씨에서 갈려나온 팔계군 용궁으로 사자태부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숙으로 신재의 12대조이다. 고조 호원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사를 지냈는데 장차 나라에 환란이 날 것을 예견하고 백운산에 은둔하였다. 그런 까닭에 손들의 터가 광양이 되었다.

최산두는 기묘명현으로 조광조와 함께 사림의 선두에 섰다. 개혁과 지치의 꿈을 펼치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교리, 사간원헌납, 예조정랑, 이조정랑, 성균관직강(겸직) 등 조정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성리대전'을 강론할 26인을 선발하여 호당(독서당)에 들어갔다. 중종은 특별히 "一人有慶寶命維新"이라 새긴 옥홀(玉笏)을 하사하였다. 이후 바람에 풀이 눕듯, 물이 아래로 흐르듯, 조광조를 중심으로 훈구파에 맞서 국정의 큰 틀을 마련하는데 힘을 쏟았다. 왕을 성군으로 변화시키는 경연 진강에 열중하고 대간의 간쟁을 통해 사림이 지향하는 도학의 이념과 정치 신념을 적극 개진했다. 사림은 여씨향약 보급, 현량과 신설, 소격서를 폐지하며 개혁의 시대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이었을까? 정국공신의 '위훈삭제'라는 강공 드라이브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가 일대반격에 나섰으니,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를 일으키며 사림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밀어 붙이는 개혁에 중종은 싫증을 느꼈고,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쓴 훈구파의 음모가 작용하면서 왕은 그쪽으로 기운다.

조광조는 화순 능주로 귀양을 가서 사사되었다. 최산두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있던 그해 12월, 37세의 나이로 화순 동복에 유배된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진강하고 간쟁했던 그는 남녘 천리 길을 걸어 첩첩산중 유배의 길을 떠나고 만다. 그는 기묘명현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증직이 되었을 때에도 제외되어 14년 동안 유배의 삶을 살았다. 그 곳, 백아산에서 뻗어 나온 옹성산, 동복 들을 향한 능선의 동쪽에 도원서원이 있다.

화순군 동복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개천을 지나 좁은 길을 타고 가면 연월마을에 이르는데, 도원서원은 마을을 넘어 외딴 곳에 자리하고 있다. 1668년(현종 9)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창건했고 1687년(숙종13) '도원(道源)'이라 사액되었다. 고종 때 훼철되었다가 1976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우국, 충정, 위민의 6년 벼슬을 사는 동안 신념을 다해 임금을 보좌했고 백성을 위해 거침없이 국정에 임했던 신재. 그러나 그는 유배기간 중 철저히 잊혀진 신하가 되었다. 서원 외삼문 앞에는 겨울바람 불고, 도착한지 오래인 우편물이 스산함을 더한다. 외삼문인 건공문, 동재 집성재, 서재 숭의재, 내삼문 규일문, 최산두 임억령 정구 안방준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 도원사는 겨울 푸른 대숲에 둘러쌓여 적막하기 그지없고, 사당 앞마당엔 낙과한 모과 몇 알 무심한 세월에 묻혀있다. 오후의 햇살이 처마에서 빗각을 이루며 동재 마루로 길게 들어오고 있다. 돌아보면 회환과 애증과 영욕의 세월들. 유배 전까지만 해도 옥당에서 붓을 세웠고, 사간원으로 간쟁을 했고, 사헌부에서 정론을 폈고, 경연에서 성청을 열었으며, 봉황지에 노닐던 신재가 아니었던가.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으로 풀숲에 내침을 당한 그의 간난신고의 세월들이 바람결에 스치고 지나간다.

서원 뒤 산등성이 서쪽이 적벽이다. 알맞게 높고 낮은 산줄기와 산자락들이 여러 갈래로 구불구불 이어지고 유순한 물줄기는 그 사이를 감돌아 흐른다. 오밀조밀하고 남도스런 아름다움이다. 신재는 이 곳 동복의 절경을 보고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날마다 산에 오르고 적벽천을 따라 거닐며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지었다. 온갖 시름과 고뇌와 한을 동복 산천에 묻으며 아픈 심신을 치유했을 것이다. 기약 없는 그의 귀양살이는 중국 최초의 시인이며 비극의 시인으로 불리는 '굴원(屈原)'을 떠오르게 한다. 신재는 긴 유배생활 중 자신처럼 간신배들의 참소로 쫓겨나 강호 사이를 소요하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멱라수에 몸을 던진 굴원에 경도하고 유유자적한 도연명을 동경하였다,

동복에서 봄을 맞이하기를 열네 번, 겨울을 보내기를 열네 번, 그러나 그는 그 세월을 자연과 시와 술로만 지내지는 않았다. 예로부터 학식이 높은 군자는 존재만으로도 향기를 풍기는 법. 불행한 유배 중에 최대 행운이 찾아오니, 바로 제자를 갖는 일이다. 적려 옆에 학관을 열고 강학에 힘써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최산후, 멀리 영남에서 까지 인재들이 모여들어 제자가 되었다. 하서는 남도의 북단 장성에서, 미암은 남도의 남단 해남에서 신재의 명성을 듣고 입문했다. 신재는 이러한 문인을 두었기에 전라도의 도통 내지 '의맥'에서 16세기 사림의 중요한 대들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빼어난 자질에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학문, 문장, 지절, 올바른 경제관 등을 갖추고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다 뜻이 꺾인 신재 최산두. 15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 1536년 53세로 고향에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적소에서 생을 마쳤다. 생전의 행적을 보면 시호를 받고도 남을만한데 유배지에서 마친 그의 신산한 삶은 그 흔한 증직이나 시호 하나 없고, 오직 민간에서 올린 '문절(文節)'이라는 사시(私諡)를 갖고 있다. 도학,절의 문장으로 쟁쟁한 하서와 미암을 길러 성리학 발전의 한 갈래를 이루었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 윤구와 더불어 '호남삼걸'의 하나로 꼽히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조광조, 양팽손, 기준과 더불어 기묘(己卯) 사학사(四學士)로 불린다. 광양시 광양읍 신재로 봉양사에, 화순 동복 도원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1.봉양사_광양시 광양읍 신재로 110 위치.조선시대 호남의 대학자 신재 최산두, 광양현감을 지낸 인재 박세후 배향(사진백옥연)

1-1.봉양사1(사진백옥연)

1-2.신재 최산두 영정(사진백옥연)

1-3.신재 최산두 영정(사진백옥연)

1-4.외삼문(사진백옥연)

1-5.봉양사 동재

1-6.봉양사

1-6.학사대_옥룡면 동곡리 _신재가 15세때 통감강목을 천_번 통독했다는 석굴 위에 있는 정자

1-7.학사대 가는 길(사진백옥연)

2.도원서원_ 전경(사진백옥연)

2-1.도원서원 외삼문(사진백옥연)

2-2. 도원서원(사진백옥연)

2-3.도원서원(사진백옥연)

2-6.도원서원 사당_도원사(사진백옥연)

2-8.도원서원 앞 모과(사진백옥연)

2-9. 도원서원 담장 위 이끼(사진백옥연)

2-10.도원사 신재선생 위패가 담긴 위함(사진백옥연)

3. 광양가는 길(사진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