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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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2) 
  • 입력 : 2020. 02.06(목) 13:48
  •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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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고 소박한 건축미, 공간 분할의 절제미

무위사 극락보전은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가 돋보인다. 옆면의 기둥과 상부의 보가 만나 이루어지는 공간 분할의 절제미는 무엇보다도 가장 뛰어나다. 나뭇결이 드러난 소슬 빗살문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하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옆면은 앞・뒷면이 좁은 한 칸이다. 기둥 위에 공포(栱包)가 하나씩만 있는 주심포계(柱心包系)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한 단층 겹처마 집이다. 주심포 양식은 지붕 하중을 기둥으로 분산하기 위한 공포를 기둥에만 둔 구조이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매우 세련된 기법이다. 건물 내부는 기둥이 없이 툭 터진 넓은 공간을 연출한다.

땅바닥에서 너무 높거나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에 막돌로 쌓아 올린 후 잘 다듬어진 석단(石壇)에 갑석(甲石)을 두른 기단을 만들었다. 갑석은 세월의 흔적으로 반들거린다. 기단은 앞쪽만을 높게 쌓고 좌우 옆면과 뒷면은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기단 하부를 두르지 않고 막돌을 이용해 쌓은 것은 배수를 쉽게 하려는 의도된 계산에서 등장한 재료의 선택이다.

주좌(柱坐: 주초 상면에 기둥을 받치는 부분을 약간 높게 한 자리)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柱心包作)을 짜 맞춰 올려서 도리나 서까래・대들보 등을 얽어매었다.

전통 목조건축의 백미, '그랭이'・'배흘림'・'귀솟음'・'안쏠림' 공법의 집대성

더구나 전통적인 목조건물의 건축공학적 특징들도 잘 적용되었다. '그랭이'・'배흘림'・'귀 솟음'・'안 쏠림' 같은 공법이 잘 드러난다. '그랭이' 공법은 기둥 밑면을 초석의 윗면 굴곡에 그대로 따 파낸 공법이다. 이러한 공법이 적용된 건물은 돌과 기둥 사이의 공간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충격이 건물에 전달되는 정도가 매우 줄어들어 지진에 상당한 내구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배흘림' 공법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볼록하게 배불러 있는 기둥을 말한다. 석양의 측광을 받았을 때 기둥의 중간 부분이 윗부분이나 아래보다 가늘어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시각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 '귀솟음'은 불전의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기둥의 높이를 조금씩 높여 지붕의 귀퉁이가 솟아오르게 한 기법이다. 이는 기둥의 높이를 똑같이 할 때 멀리서 보면 양 추녀가 지붕 무게로 인해 아래로 쳐져 보이는 시각적인 불안감에서 적용되었다. '안쏠림'은 '안오금'이라고도 하는데 기둥이 건물 안쪽을 향해 쏠리도록 기울여 세우는 독특한 기법으로 지붕의 무게에 의하여 기둥이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것을 막고 시각적으로도 건물이 벌어지게 보이는 것을 방지한다.

'그랭이' 기법은 사실상 내진설계를 한 셈이고 '배흘림'・'귀 솟음'・'안 쏠림(안 오금)'은 착시현상을 시각적으로 보정하기 위해 마련한 심리적인 보완책이다. 이러한 공법은 용마루 선을 공그려 처지게 하여 주변 노년기 산등성이와 어울리게 하는 시각적인 조화까지도 고려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의 목조건축 기술 수준이 잘 드러난다.

세종대왕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무위사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무위사의 중심불전으로 중심축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후불벽화의 화기를 토대로 성화(成化) 12년(1476년)보다는 앞서 지어진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에 극락보전 기와와 기둥들을 뜯어내는 해체 복원 공사 도중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宣德五年五月卄五日指兪孝寧(선덕오년오월입오일지유효령)'이란 묵서명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 1430년(세종 12)에 효령대군의 지원으로 건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위사 극락보전 묵서명 상량문'에 등장한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 1. 6.~1486. 6. 12.)은 태종의 둘째 왕자이자 세종의 둘째 형으로 무위사 극락보전 중창에 지유(指諭)로 참여하였다. 지유(指諭)는 공장명(工匠名)으로 고려시대에 사용되었던 목공(木工)・석공(石工)・화공(畵工) 등의 기술직 관료공장(官僚工匠)에게 붙여진 일종의 관직명이다. '고려사(高麗史)'권(卷) 80, 식화(食貨) 3 ?諸衙門工匠別賜?에 '後三百日以上者給之 文宗三十年定'이라는 기록이 있고 이어서 각 관서의 명칭과 공장(工匠)에 대한 녹봉액이 명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목업지유(木業指諭)·석업지유(石業指諭), 그리고 조각장지유전전(彫刻匠指諭殿前)·화업지유(畵業指諭)·소목장지유(小木匠指諭) 등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의 건축공장(建築工匠)에 대한 관직 제도가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다. 이로써 무위사 극락보전 건립은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사업임이 분명하다.

행호 대선사와 효령대군, 그리고 무위사 극락보전

효령대군이 무위사 극락보전을 짓는 일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가까운 백련사에 주석한 조선전기 천태 승려 행호(行乎, ?~1446)와의 친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행호 대선사는 태종대부터 왕실과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세종 1년인 1418년에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로 임명된 마지막 천태종 최고 승려로 추앙받았다. 1424년 불교종단이 통폐합된 후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도 일대의 사찰을 중수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유생들의 강한 척불론 속에서도 효령대군 등의 귀의를 받아 왕실에 대한 불교 보급에 힘썼다.

백련사는 1407년에 조계종 자복사로 지정되었지만 일주일 만에 왜구의 침략으로 전소하게 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행호는 백련사 중창을 발원하고 효령대군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다. 효령대군은 행호 대선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 대공덕주로 참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강진의 토착세력들이 가세하여 백련사는 중창되었다. 무위사는 백련사와 거리가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원래 선종사찰이었던 무위사가 1407년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선정이 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행호 스님과의 인연으로 효령대군이 무위사 극락보전의 건립에 참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행호 대선사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만덕산 백련사의 중수한 시기는 1430년부터 1436년까지이고 무위사 극락보전을 효령대군이 지유로 참여하여 완성할 때는 1430년이다. 이로 미루어 효령대군은 거의 같은 시기인 1430년에 백련사의 중창불사와 무위사 극락보전의 건축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강진지역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다가 18세기에 작성된 '全羅左道康津月出山無爲寺事蹟'(住持 克岑, 1739년)에는 무위사를 효령대군이 강진에 머무를 때 이용하는 '祝釐願堂(축리원당)'(소원을 빌기 위한 건물)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었다.(孝寧大君駐?於康津之時開祝釐願堂)

불전 내부 불단 구조의 획기적인 변화

무위사 극락보전의 내부 불단 구조가 이전 시대인 고려시대에 건립된 불전의 불단 구조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여러 사례와 비교를 해 보았다. 고려 후기의 불전인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 수덕사 대웅전(1308년),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430년 이전)과 조선전기의 불전인 무위사 극락보전(1430년, 불단 개조 1476년경), 봉정사 대웅전(1435년), 개심사 대웅전(1484년)의 불전 내부는 불단의 위치?바닥마감?천장?창호 등에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개조하거나 개선하게 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조선전기의 불전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내부는 고려후기 불전들과는 다르게 구성되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안동 봉정사 대웅전이나 개심사 대웅전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불전들에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양상으로 변모되어가는 초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전 내부에 설치하는 불단은 형태에 따라 크게 대좌형(臺座形)·보전형(寶殿形)·불탁형(佛卓形)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대좌형과 보전형은 불상을 봉안하는 목적만을 가지지만 불탁형은 앞에 별도로 보조단을 덧붙여 공양물을 진설(陳設)하게 하려는 목적에 따라 규모가 커지는 등 보다 발전된 특성을 지닌다. 보전형은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이, 대좌형은 수덕사 대웅전(1308년)이 대표적이다. 특히 보전형은 고려시대 불전에서 흔히 보이는 구조이고 조선시대에서도 특수한 성격의 보조 전각에서 그 모습이 보인다. 불탁형은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최초로 등장했으며 조선시대에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불탁 좌우와 앞면 앞의 외곽에 보조단을 덧붙여서 공양물을 진설하기 위한 공양대인 '마지단(摩旨壇)'을 마련하고 결과적으로 불상을 높게 봉안하는 대좌 밑바닥의 역할도 겸한다.

불전 내부 구조와 천장, 창호, 바닥재의 변화

고려 후기와 조선전기의 불전 내부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점이 드러난다. 고려 시대에는 불전 뒤쪽의 내진주와 외진주가 일렬을 이룬 정치법(正置法)을 채용하였으나 개심사나 무위사의 경우 내부 고주(高柱)가 없고 봉정사 대웅전은 외부 기둥과 내진주의 배치가 외진주 선상에서 뒤로 이동하는 이주법(移住法)을 채용하였다. 후치법(後置法)은 내진주 없이 불단을 후벽에 맞붙게 하는 것으로 조선전기에는 사례가 없으며 조선 후기인 1626년에 중창한 안심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천장의 경우 고려 후기 불전에서는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만 나타났던 데 비해 무위사 극락전과 개심사 대웅전에 와서는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이 함께 나타난다. 고려 후기 불전들의 경우 창호가 정면 중앙 어칸의 판장문과 좌우 양협칸의 살창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조선전기에는 정면이 모두 문으로 이루어지고 문의 종류도 살창 형식의 분합문으로 변화하였다. 바닥 마감재는 고려시대에는 전돌이 대부분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마루가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변화들의 배경에는 조선전기 불전 내부의 활동이 많아진 것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고려시대에서는 불상을 봉안하는 목적만 가졌던 불단은 조선시대에는 공양대를 설치하는 불탁의 형식도 함께 갖추게 되었다. 또한 불단 뒤쪽의 내진주가 양쪽의 외진주보다 뒤로 물러나는 이주법은 조선시대에 보편화 되었는데 많은 신도들을 수용하기 위한 내부 공간 확보의 필요성 때문에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창호의 변화로 인해 불전 내부는 통풍과 채광을 중시하던 고려시대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완전히 개방적인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거주성이 높고 장시간 머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마루의 설치는 한국주택 건축의 양식을 도입한 자생적 요소이다.

2. 1980년대 무위사 극락보전 전경(출처: http://roks821.egloos.com/)

3. 1980년대 무위사 극락보전 전경(문화재청)

4. 극락보전 상량문(??康律無爲寺極樂殿修理報告書??, 1984,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5. 무위사 극락보전 앞면(사진 황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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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위사 극락보전 옆면(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