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장화왕후와 왕건의 운명적인 만남, 나주 완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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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장화왕후와 왕건의 운명적인 만남, 나주 완사천
나주, 고려 제2代 왕 혜종 낳은 또 하나의 어향||완사천 설화 ‘동국여지승람’ 흥룡사편에 전해져||고려 현종 나주 몽진 알려주는 금성관 사마교비
  • 입력 : 2020. 03.24(화) 16:23
  • 편집에디터

오페라로 만나는 왕건과 장화왕후

장화왕후 오씨 유적비

고려 현종 나주 몽진 금성관 사마교비

장화왕후 오씨가 완사천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그릇을 건네고 있는 모습. 필자 제공

장화왕후, 왕건을 만나다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일전을 벌였던 현장이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 일대다. 나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두 세력이 맞붙어 싸우곤 했지만, 힘의 균형을 갈라놓은 곳은 왕건이 화공(火攻)으로 견훤의 수군을 크게 이긴 '덕진포 전투'가 행해진 영산강이었다.

광주·전남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나주 호족만큼은 왕건을 지지했다. 나주 호족의 왕건 지지는 역사적 격동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 된다. 나주 호족과 왕건과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빨래하는 우물 샘, 완사천(浣紗泉)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완사천 설화의 내용이 『동국여지승람』 「불우조」 흥룡사 편에 다음처럼 실려 있다.

"고려 태조 장화왕후 오씨의 조부는 부돈이요,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인데, 대대로 주의 목포에 살고 있었다. 다련군은 사간(沙干) 연위의 딸 덕교를 아내로 맞아 장화왕후를 낳았다. 장화왕후가 일찍이 꿈을 꾸는데 바다의 용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놀라 깨어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이상히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태조가 수군 장군으로 나주에 와 진수(鎭守)할 때, 목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서려 있으므로, 태조가 그리로 가 보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는데 미천한 신분이라고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정액을 자리에 쏟았더니 왕후가 곧 빨아먹었다.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혜종이다. 얼굴에 자리 무늬가 있으므로 세상에서는 돗자리 임금이라 불렀다."

이후 이 설화에 버들잎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 공손히 바친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 것 같아 천천히 드시도록 한 것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끌려 장화왕후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사료 속 왕건이 배를 정박시킨 목포(木浦)는 어디일까? 지금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가 아님은 분명하다.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 나주역(나주시 송월동)이 들어서 있는 옛 동구나루 터로 추정된다.

용꿈을 꾼 우물가 처녀는 나주지방 호족인 오다련의 딸로 훗날 태조 왕건의 제2비인 장화왕후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武)는 고려 2대 왕 혜종이 된다. 후에 왕이 태어난 이 일대를 흥룡동이라 불렀고, 주위에 흥룡사라는 절을 지었다. 흥룡사에는 혜종을 모신 혜종사가 있어 나주인들은 고려 시대 내내 제사를 올렸다.

김종직, 완사천을 노래하다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난 장소 완사천은 이후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후대인들의 시어(詩語)가 되기도 했다. 완사천을 노래한 인물 중 경남 밀양 출신으로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점필제 김종직(1431~1492)이 대표적이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받은 1487년 나주를 직접 방문하여 몇 편의 시를 남기는데, 그중 하나가 '금성곡' 세 번째 시다.

"고려 태조께서 그 때에 군함을 여기에 대고서(龍孫當日艤戈船)/ 아침엔 구름 되고 저녁엔 비 되는 신녀를 만났다네(忽夢朝雲暮雨仙)/ 미천한 신분으로 제왕과 연을 맺은 박희의 일과 닮았으니(千載薄姬眞合轍)/ 행인들은 그곳을 가리켜 완사천이라 한다네(行人指點浣紗泉)"

시 중에 오다련의 딸로 고려 제2대 왕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를 박희란 여인에 비유한 대목이 나온다. 박희는 중국 한고조의 후궁으로 한나라 제4대 황제인 문제를 낳은 여인이다.

왕건과 오씨가 만난 완사천은 중국 춘추시대의 미인 서시(西施)의 고사에 등장하는 완사계(浣紗溪)라는 지명을 염두에 두고 이름 지어진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월나라에서 출생한 서시는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 중 가장 오랜 인물이다. 아버지는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빨래가 직업이었다. 서시도 늘 시내에 나가 빨래를 했는데, 이 때문에 서시의 고향 마을의 시내를 '빨다', '세탁하다'의 뜻의 '완(浣'자를 써 완사계(浣沙溪)라 불렀다. 김종직은 완사천의 설화를 중국의 고사나 지명에 빗대어 재해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신증여지승람』에 나오는 "태조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는데 신분이 미천하여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정액을 자리에 쏟았더니, 왕후가 곧 빨아먹었다.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혜종이다. 얼굴에 자리 무늬가 있으므로 세상에서는 '주름살 임금님'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런데 주름살 임금 설화는 김종직의 시에도 등장한다. 그의 '금성곡' 네 번째 시에 혜종의 외가 동네를 언급하면서 혜종을 '추대왕(皺大王)', 즉 '주름살 임금'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 전혀 비과학적인 '주름살 임금'이란 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 장화왕후가 왕건을 만난 우물 이름은 중국 4대 미녀 중 한 사람인 서시가 살던 고장의 '완사계'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다. 서시는 부친이 나무꾼이고, 모친은 빨래가 직업이었으니 미천한 신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장화왕후는 나주를 대표하는 호족의 딸이 아닌가? 서시와 비교되어 후대에 만들어지면서 미천한 신분으로 그려진 것은 아닐까? 미천한 신분으로 그려야 왕건을 만나 왕후가 되는 과정이 신데렐라처럼 극적일 수 있겠다.

현종, 전주 대신 나주를 선택하다

나주가 다시 고려 왕조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제2차 거란의 침략 때였다.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받자, 현종은 금군(禁軍) 5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도 적성을 거쳐 양주로 피난길을 떠난다. 현종이 차령을 넘고 공주를 지나 삼례에 도착했을 때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마중 나와 전주로 가기를 청한다. 당시 고단한 피난길을 생각하면 대읍이던 전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런 모양새였을 것이다. 그런데 왕을 보필하던 박섬이 반대하고 나선 이유가 흥미롭다. "전주는 옛 백제 땅으로, 태조 왕건이 혐오했던 곳이기 때문에 어가를 옮길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왕은 박섬의 주장에 따라 전주 대신 나주를 택한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에는 이 부분이 다음처럼 기록되어 있다.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야복(野服)을 입고 어가를 맞이하였는데, 박섬이 아뢰기를, "전주는 옛 백제 땅이므로 성조(聖祖)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옳다고 여겨 곧장 장곡역으로 가서 묵었다."

박섬의 주장은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고려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인데 반해, 나주는 태조 제2비인 장화왕후 오씨의 고장이자 2대 혜종의 탄생지로 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전지대였다. 당시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는 위험성이 존재할 수 있는 전주보다는 혜종이 태어난 나주를 택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주 금성관 뜰에는 당시 현종의 피난 사실을 알려 주는 사마교비(四馬橋碑)가 남아 있다.

이후 나주는 고려 왕조가 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 왕조를 지켜낸 최후의 보루처 역할을 한다. 무신정권 말기인 1236년 담양에서 이연년 형제가 백제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광주를 점령한 뒤 나주까지 진출했다. 이때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주에 파견된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은 나주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이 고을은 어향(御鄕)이니 다른 고을처럼 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라고 연설한다. 그리고 금성산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별초 30명을 이끌고 성 밖을 나가 이연년 군을 진압한다. 즉 김경손은 나주가 혜종의 탄생지임을 강조하면서, 나주인들의 결집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백제 부흥 운동이 평정된 뒤 나주는 고려 정부를 상징하는 거점이 된다. 고려 정부가 원에게 항복한 뒤 삼별초가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서남해의 진도를 거점으로 대몽항전을 전개하면서 남도의 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때에도 나주의 호족이었던 김응덕과 정지려 등은 고려 왕조를 등진 삼별초와 싸워 나주성을 7일이나 지켜낸다.

완사천

완사천, 현장을 찾다

고려 태조 왕건이 장화왕후를 만난 완사천의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說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설화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어떤 문화 원형을 기반으로 한다. 완사천 설화의 핵심은 왕건과 나주 호족을 대표하는 오다련 집안과의 정략적 제휴였고, 그 제휴의 결과물이 완사천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포장된 정략결혼이었다. 이후 왕건은 나주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고,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따라서 완사천은 고려 왕조의 개국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재미있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완사천 설화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자.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기 전인 903~914년 사이 10여 년 동안 태봉국 궁예의 장군으로 나주에 내려와 후백제 견훤과 싸운다. 완사천 설화는 이때의 이야기가 배경이 된다. 왕건이 수군 장군으로 나주에 와 목포(지금의 나주역 일원)에 배를 정박했을 때 금성산 자락에 오색구름이 서려 있어 신기하게 여겨 가 보니,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서 건넨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염려하여 천천히 드시도록 한 것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끌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이 분이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로 후일 태조의 제2비가 된 장화왕후 오씨다. 왕건과 장화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무(武)는 고려 제2대 왕에 오른다. 후일, 혜종이 태어난 완사천 일대를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고, 전설 속의 샘을 완사천이라 부르게 된다.

완사천 부근에 흥룡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흥룡사에는 혜종 임금의 형상을 모신 혜종사(惠宗祠)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혜종을 기리는 흥룡사도, 혜종사도 남아 있지 않다. 세종 11년(1429) 신주를 모시던 관리였던 장득수가 혜종의 소상과 진영을 옥교자(屋轎子)에 모시고 2월 6일 서울로 떠났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가 만났다는 완사천(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은 나주 시청 앞 입구에 잘 정리되어 있다. 우물, 완사천은 복원되었고, 우물가에는 버드나무도 서 있다. 완사천 앞에는 걷고 지나가는 돌판에 완사천의 설화를 새긴 예쁜 돌길도 나 있다.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로 옆에는 왕건이 물을 청하고, 장화왕후가 버들잎을 띄운 바가지를 건네는 모습을 조각한 동신대학교 김왕현 교수의 조각작품도 있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물을 요구하는 왕건의 모습이 조금은 거만스럽다. 조각상 뒤에는 1989년에 건립된 '고려 왕건 태자비 장화왕후 오씨 유적비'라 새긴 거대한 유적비도 버티고 서 있다.

왕건이 정박 후 배에서 내린 당시 항구 목포는 완사천에서 길 건너 바로 보이는 나주역 부근으로, 당시는 동구나루(터)였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드나들었던 나루터가 오늘 기차를 타고 드나드는 기차역으로 변했으니, 배가 기차로만 바뀌었을 뿐 동구나루(터)는 천년이 지난 오늘도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고려와 나주 호족이 결합한 사실이 완사천 설화로 만들어졌지만, 설화 속의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사랑 이야기는 참 아름답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