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57호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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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국보 제57호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철감선사 도윤 쌍봉사 창건, 입적후 승탑에 사리 모셔 ||팔각원당형 화강암 승탑에 사천왕, 가릉빈가 등 새겨 ||손톱크기 막새기와에 8장 연꽃 정밀하게 조각 ‘감탄’||
  • 입력 : 2020. 04.07(화) 13:11
  • 편집에디터

모든 승탑을 제치고 교과서에 실린 '국보 제57호 철감선사 승탑'이 있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영정

철감선사 승탑

승탑 수막새에 새긴 연꽃

불타기 전 대웅전 모습

극락정토에서 노래하는 극락조, 가릉빈가

우리나라에 승탑(僧塔)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 유행한 선종 불교와 관련이 깊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한 선종(禪宗)은 깨우침을 인도해주는 스승이나 정신적 지주인 멘토(mentor)를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선종 불교에서는 깨우침을 안내해주는 스승을 부처님처럼 소중하게 모셨고, 스승이 입적하면 화장 후 사리(舍利)라 불리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모아 멋진 조형물 속에 안치했는데, 이를 승탑이라고 한다.

신라말 고려 시대의 멋쟁이 승탑 대부분은 팔각원당형이다. 팔각형인데 '둥근 집'이란 뜻의 '원당(圓堂)'이 붙은 것은, 팔각형이 원형에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실린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승탑도 둥근 팔각원당형이다. 왜 철감선사 승탑이 모든 승탑을 제치고 교과서에 실렸는지, 왜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철감선사 승탑의 높이는 2.3미터이며, 재료는 가장 단단해서 작업하기 어려운 화강암이다. 탑은 받침대의 아랫돌, 받침대의 중간돌과 윗돌, 몸돌, 지붕돌 등 총 4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받침돌과 몸돌, 지붕돌에는 각각 구름, 사자, 가릉빈가, 사천왕, 비천 등의 문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각 부분의 문양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받침대의 아랫돌에는 꿈틀거리는 구름 문양 속에 용이 새겨져 있고, 구름 위에는 8마리의 사자가 다양한 포즈를 취한 채 앉아 있다.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 부르듯, 불교와 사자는 인연이 깊다. 불교 관련 조형물에 새겨진 사자는 주로 불법을 수호하는 의미를 지닌다. 화엄사의 4사자 3층 석탑(국보 제35호)이나 광주 박물관 로비에 있는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의 몸돌을 사자가 받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찰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사천왕상도 마찬가지다.

승탑에서 가장 잘록한 허리 부분과 연꽃을 하늘로 향해 새긴 앙련(仰蓮) 위의 안상(眼象)에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둘의 모양이 다소 다르다. 아래 가릉빈가는 몸 전체가 새이고 얼굴만 사람이지만, 위의 가릉빈가는 하반신만 새이고 상반신은 사람이다. 가릉빈가는 극락조다. 극락정토에서 노래하는 극락조는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극락정토의 설산에 산다는 상상의 새다. 따라서 위에 새겨진 가릉빈가의 모습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가릉빈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며, 춤을 잘 춘다고 하여 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미음조(美音鳥) 또는 선조(仙鳥)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비파, 피리, 퉁소, 바라, 장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마치 주인공 철감선사가 극락정토에 들어온 것을 축하하는 공연을 하는 것 같다.

불교 관련 유물에는 코끼리 눈을 형상화한 안상이 많다. 이는 석가모니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고 세상에 태어날 때 코끼리를 타고 계셨던 것과 관련이 있다.

막새기와에 새긴 여덟 장 꽃잎

승탑의 핵심은 주인공의 사리를 모신 몸돌(塔身)이다. 몸돌의 남쪽과 북쪽 면에 문고리가 달린 문비(門扉, 문짝)가 새겨져 있고, 앞문과 뒷문의 좌우에는 험상궂게 생긴 사천왕이, 나머지 두면은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이 새겨져 있다. 갑옷 입은 험상궂은 사나이들, 그들이 1,200년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문비 안에 들어 있는 승탑의 주인공 철감선사의 유골이다. 몸돌의 사천왕과 비천은 옷 매듭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옥개석(屋蓋石)으로 불리기도 하는 지붕돌은 최고 수준의 조각 솜씨가 발휘되어 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낙수면은 기왓골이 깊고, 각각의 기와 끝은 막새기와가, 처마에는 서까래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지름 2센티에 불과한 손톱 크기의 막새기와에는 여덟 장의 연꽃문양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승탑에 새겨진 문양 중 압권이다. 지붕돌은 전체가 하나의 돌이기때문에 석공이 막새기와 속 연꽃 하나만 잘 못 건드려도 승탑은 망가지고 만다. 승탑의 주인공 철감선사도 부처지만, 이 멋진 작품을 남긴 석공도 부처가 아니었을까?

수년 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철감선사 승탑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뛰어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대표작품인 '피에타', '다비드' 등은 조각하기 비교적 쉬운 대리석인 반면, 철감선사 승탑은 가장 조각하기 어려운 화강암이다. 규모 자체도 철감선사 승탑이 뒤지지 않는다. 화강암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과 더불어 석공의 깊은 신앙심까지 느껴지는, 당대 승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철감선사 승탑이 모든 승탑을 제치고 교과서에 실린 이유다.

그런데 오늘 최고의 걸작 철감선사 승탑은 안타까움을 품은 채 서 있다. 지붕돌 위 상륜부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 멋진 지붕돌마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도굴꾼들이 승탑 안에 넣어 둔 금·은으로 제작된 사리장치를 훔치기 위해 넘어뜨렸기 때문이다. 1,200년을 버텨 온 세계 최고의 걸작품이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졌다.

철감선사 승탑의 주인공, 도윤

승탑의 주인공 철감선사 도윤(798∼868년)은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로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법명은 도윤이며 시호는 철감, 속성은 박씨다. 철감선사의 '철감(澈鑒)은 그가 죽은 뒤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경문왕이 내린 시호다.

그의 어머니가 신이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학과 봉황의 자태였다니, 떡잎부터 달랐던 것 같다.

18세가 되던 헌덕왕 7년(815)에 화엄종 사찰로 유명한 김제 모악산의 귀신사(鬼神寺)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 그는 귀신사에서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하였지만,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禪)보다 못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당나라 유학이었다.

헌덕왕 17년(825)에 당에 건너간 철감선사 도윤은 보원선사(普願, 748∼835)의 제자가 되어 선종을 배우고 법통을 전수받는다. 28세 되던 해였다. 첫눈에 큰 그릇임을 알아본 보원이 도윤에게 심인을 전한 뒤, "그의 법이 신라로 간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스승인 보원선사 사후 13년을 더 당에 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한다. 귀국 후 금강산 장단사에 잠시 머물다 화순 쌍봉사를 창건한다. 쌍봉사에 머물렀던 10여 년간 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교세를 떨친 후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한다.

쌍봉사에 머물던 기간에 9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그의 종파적 전통을 이어받은 징효(澄曉, 831~895)가 지금의 법흥사인 영월의 흥녕사에서 사자산문을 연다. 생전에 그의 덕망이 세상에 널리 퍼지자, 경문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스승으로 삼았고, 그가 죽자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철감선사 도윤은 무등산 자락의 증심사를 개창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화순 쌍봉사와 무등산 증심사를 개창, 우리 지역 남도에 선풍을 일으킨 철감선사 도윤은 세계 최고급 걸작이 된 그의 무덤인 승탑과 함께 남도인에게 특별한 인연으로 길이 남을 것 같다.

쌍봉사, 현장을 찾다

필자가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위치한 쌍봉사(雙峰寺)를 열 번도 더 많이 찾은 것은 순전히 명품 철감선사 승탑 때문이었다. 꾸밈없는 순수한 산사의 모습도, 목탑 형식의 대웅전도 매력 만점이다. 쌍봉사는 계절마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가을 단풍과 가장 잘 어울린다.

화순에서, 보성 쪽으로 가는 29번 국도를 따라가다 이양터널을 지나 왼쪽으로 난 843번 도로를 타고 가면 나온다. 비포장의 주차장 곁에 사찰 입구임을 알리는 '쌍봉사자문(雙蜂師子門)'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쌍봉사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대웅전부터가 확 관심을 끈다. 팔작지붕이나 맞배지붕 형태가 아닌 사모지붕인데다, 단층이 아닌 3층의 목탑형태이기 때문이다. 목탑 형식의 건축물로 현존하는 것은 둘 있다. 하나는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필자가 서 있는 쌍봉사 대웅전이다.

목탑 모습의 쌍봉사 대웅전은 1936년 보물 제173호로 지정되면서 한때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1984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보물 지정도 해제되고 만다. 지금 대웅전은 1985년 다시 복원된 건물인데, 사진으로만 남은 이전의 대웅전 건물과는 많이 달랐다. 불에 탄 것도 안타까운데, 복원마저 미숙하니 분통이 터진다. 밖에서 본 외관은 3층인데, 안을 들여다보니 통층으로 층의 경계가 없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데 좌·우측에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서 있다. 대웅전 뒤로 나한전, 극락전, 창건주인 철감선사의 영정을 모신 호성전이 있다.

명품 철감선사 승탑을 만나기 위해서는 대웅전 왼쪽으로 난 돌길을 따라 백여 미터 걸어 올라가야 한다. 돌길의 끝자락에는 담장이 둘러 있고, 담장 안에 승탑과 탑비가 나란히 있다.

명품 승탑은 늘 필자를 감동시킨다. 이전에는 화려한 문양이었는데, 오늘은 승탑의 당당함이 또 필자를 감동시킨다. 승탑은 1,200년을 버티고 서 있으면서 찾아오는 방문객을 그렇게 맞고 있었다. 앞으로 서 있었던 세월만큼 더 서 있을지,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승탑에 대한 설명은 본문을 참조 바란다.

국보 제57호 철감선사 승탑 곁에는 탑 주인공의 일생을 새긴 '쌍봉사철감선사탑비(보물 제170호)'도 함께 서 있다. 탑비의 건립 시점도 철감선사가 입적한 868년 직후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탑비는 비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몸돌인 비신(碑身), 그리고 머리 모양의 이수(螭首)로 구성된다. 그런데 주인공의 일생을 담은 몸돌이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안내판의 설명을 보니 일제 강점 시기에 없어졌다고 한다.

사각형의 바닥 돌 위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모양인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북 등은 이중 테두리의 6각형 무늬를 선명하게 새겼다. 특히 앞 오른발의 세 개 발바닥이 땅에서 들어 올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귀부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수는 용 조각을 생략하고 구름무늬만 새겼다. 귀부와 이수만 남았지만, 대단한 조각 솜씨를 뽐낸 명품이다.

쌍봉사에는 세 가지 안타까움이 있다. 철감선사 승탑의 지붕돌이 깨진 것이 첫 번째요, 탑비의 몸돌이 사라진 것이 두 번째이며,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보물 지정이 취소된 것이 세 번째다.

천하의 명품 철감선사 승탑과 탑비, 목탑 형식의 대웅전은 쌍봉사만의 것이 아닌 남도인 모두의 것이다. 남도인이 지켜야 하고, 지켜내야 하는 이유다.

철감선사비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