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함평 모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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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함평 모평마을
이돈삼 / 여행전문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20. 04.24(금) 07:51
  • 편집에디터

모평마을 항공사진

"이게 토종 벚꽃이거든요. 꽃이 활짝 피어서 고택과 어우러져 있는데, 얼마나 이쁘던지. 황홀하더라고요. 가슴이 쿵당쿵당 뛰었어요. 한눈에 반했죠."

임선희(51) 씨의 말이다. 나비축제를 보러 함평에 왔던 그는 집으로 올라가자마자 짐을 꾸렸다. 인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2011년 가을이었다.

임 씨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이다.

"이 마을이다 싶었죠. 귀촌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귀촌하면 고택에서 살고 싶었어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그해 가을에 내려왔어요. 지금도 이 벚꽃에 반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 풍경이 1년을 살게 해주는 힘입니다. 여유도 생겼고, 사는 재미도 쏠쏠해요."

임 씨의 얘기다. 그가 한눈에 반한 벚나무 옆 고택은 영양재(潁陽齋).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집이다. 130여 년 전 천석꾼이던 윤상용이 지었다. 옛사람의 풍류와 검소한 성품이 배어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임 씨는 집주인을 찾아가 임대를 부탁했다. 옛집을 문화공간으로 단장해 활용하겠다고 약속하고, 허락을 받았다. 집 안팎 청소를 하고, 묵은 먼지를 다 털어냈다. 주변의 잡풀을 뽑고 잔디도 심었다. 전통찻집 '영양재'로 문을 열었다.

마을사람들이 좋아했다. 마을을 찾은 외지인들도 반겼다. 찻집에서 잠시 쉬며, 차를 한 잔씩 마시고 갔다. 필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찻집에서 내려다보는 전망도 좋다. 아름다운 마을을 빛내주는 옛집이다.

영양재를 둘러싸고 있는 임천산의 대밭과 차밭도 다소곳하다. 사철 푸르름을 뽐내는 숲이다. 산책길도 나 있다. 영양재에서 대숲과 차밭, 편백숲을 거쳐 마을정자로 이어진다. 하늘하늘 걸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평마을은 오래된 양반고을이다. 옛집이 즐비하다. 황토 빛깔의 흙담과 기와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집 마당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어여쁘다. 옛집 처마의 곡선도 단아하다.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걷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마을이 결코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골목마다 정감이 흐르는 옛 고향 마을 같다.

마을에서 눈에 띄는 게 숲이다. 해보천을 따라 느티나무와 팽나무, 왕버들 수십 그루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봄햇살을 받은 연둣빛 이파리가 새봄을 노래한다.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다. 풍수지리상 마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비보림이기도 하다. 산림청과 생명의숲 등이 주관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았다. 마을과 숲이 한데 어우러져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여름에 수련을 피우는 연못도 있다.

숲 앞에 있는 임천정사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눈에 봐도 색다른 한옥이다. 파평 윤씨의 제실이다. 입향조 윤길이 지었다. 한때 인재양성 공간으로 쓰였다. 마을의 크고 작은 잔치도 여기서 했다. 제실 앞을 지나는 작은 도랑에는 물이 졸졸졸- 흐른다. 숲에서 새소리도 들려온다.

담장 밖에서 한옥을 배경으로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도 정겹다. 문숙공 윤관의 영정을 모신 수벽사, 사헌부대사를 지낸 윤화자가 부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지은 귀령재도 오래된 집이다.

왕대로 둘러싸인 안샘은 옛 관아에서 쓰던 우물이다. 마을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주민공동체의 터전이다. 이름처럼 편안한 쉼터 역할도 했다. 마을에 정려비도 줄지어 있다. 눈길을 끄는 게 충노비(忠奴碑)다. 노비 도생과 유모 사월의 충정을 기리는 정려비다.

1597년 정유재란 때다. 전장에 나간 윤해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놓였다. 부인 신천 강씨가 일본군을 가로막고 섰다가 칼을 맞았다. 윤해와 부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남 17살 청립이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청립은 도생과 사월에게 4살짜리 동생(정립)을 부탁했다. 청립도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도생과 사월은 주인의 빈자리를 대신해 정립을 잘 키웠다. 윤씨 가문을 지켰다. 나중에 이 집안의 후손들이 충노비를 세웠다. 노비까지도 배려하고 기린 윤씨 가문의 마음씨가 비석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충노비 외에 정려각, 열녀각도 많다. 공적비, 충열비, 열녀비 20여 기가 세워져 있다. 신천 강씨, 함평 이씨, 진주 강씨, 광산 김씨, 충주 박씨, 이천 서씨 등을 기리는 비석이다. 주인공들이 지닌 이야기도 애틋하다.

모평마을은 함평의 근간이 됐다. 함평(咸平)이란 지명이 여기서 나왔다. 고려 때까지 함평은 '모평'과 '함풍'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모평마을을 중심으로 한 해보와 나산·월야의 모평현, 함평읍을 중심으로 한 함풍현이다. 1409년(태종9년)에 두 현이 합해졌다. 함풍의 함(咸), 모평의 평(平) 자를 따서 함평이라 이름 붙었다. '호남가'의 첫 대목을 차지할 정도로 유서 깊은 고을이 됐다.

모평마을은 함평 모씨(牟氏)가 처음 마을을 이뤘다. 1460년께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황해도 집으로 돌아가던 윤길이 이곳에 반해 눌러앉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됐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벼농사를 주로 짓던 평범한 농촌이었다.

마을에 농촌종합개발사업과 행복마을 조성사업이 들어오면서 바뀌었다. 시멘트 담을 허물고 돌담을 쌓았다. 철문 대신 솟을대문으로 바꿨다. 흔적만 남아 있던 물레방앗간을 복원하고, 뒷산에 산책길과 등산로도 냈다. 고풍스런 한옥도 새로 지었다.

대처로 떠나려던 젊은이들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사람이 줄기만 하던 마을에 귀농·귀촌인도 들어왔다. 마을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지금은 함평천지의 중심이었던 옛 영화를 그리고 있다. 다사로운 봄햇살이 옛집 마당에 고스란히 내리쬔다.

이돈삼 / 여행전문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모평마을 풍경

가시나무 있는 집 정원

가시나무 있는 집 정원

가시나무 있는 집 정원

모평마을 숲

모평마을 숲

모평마을 숲

물레방아

물레방아

영양재

영양재

영양재

영양재

영양재에서 본 마을풍경

영양재에서 본 마을풍경

영양재에서 본 마을풍경

영양재에서 본 마을풍경

영양재에서 본 마을풍경

영양재에서 본 마을풍경

임천정사와 차밭

충노비

충노비

충노비

충노비와 임천정사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