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동국 선종의 종갓집, 동양 3보림중 하나 장흥 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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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동국 선종의 종갓집, 동양 3보림중 하나 장흥 보림사
신라 경덕왕 때 건립…한국 불교문화사 절대적 위치||국보 117호 비로자나불 좌상 신라 하대 철불 대표작||국보 44호 남탑·북탑·석등, 한국 석탑·석등의 기준||6·25 때 전각 대부분 소실… 대웅보전 등 근래 복원
  • 입력 : 2020. 06.02(화) 17:41
  • 최도철 기자

장흥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계곡에 있는 동양 3보림 가운데 하나인 보림사(寶林寺)는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문을 연 우리나라 선종의 종갓집이다. 장흥군 제공

보조선사 체징 영정

9세기 불교 미술의 기준, 장흥 보림사

장흥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계곡에 있는 보림사(寶林寺)는 동양 3보림(인도, 중국, 한국)의 하나로,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문을 연 우리나라 선종의 종갓집이다. 따라서 보림사는 남도 불교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불교 및 문화사에서도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은 "한국 미술사 혹은 문화사에서 장흥 보림사가 갖는 위치는 절대적"이라면서, "만약 9세기 신라 하대의 문화를 논하면서 장흥 보림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엉터리"라고 단언할 정도다.

9세기는 신라 문화의 중심이 경주에서 지방으로, 사상적으로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 문화변동의 상징적 유물이 호족의 이미지를 닮은 철불의 등장이었고, 깨달음을 얻은 대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의 유행이었다.

장흥 보림사는 철불로 만든 비로자나불과 보조선사 체징의 승탑, 완벽한 형태의 삼층석탑과 석등까지 모두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유물들은 모두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9세기 불교 미술사의 기준이 된다. 왜 유홍준이 한국 불교사에서 장흥 보림사가 갖는 위치가 절대적이라고 했는지를 알겠다.

보림사가 세워진 것은 경덕왕 18년(759) 원표에 의해서였다. 당나라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에게 선종의 법통을 전수받은 도의선사가 선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수받은 보조선사 체징이 원표가 세운 암자에 천칸의 불궁을 세워 가지산문의 선풍을 크게 떨친다.

그러나 천년 고찰 보림사도 한국 전쟁의 비극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한국 전쟁으로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된다. 근래에 대웅보전, 대적광전 등의 건물이 복원되었지만, 동양 3보림이라 불린 명품 보림사의 흔적은 천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 온 철불과 석탑, 승탑 등에 묻어 있다.

보림사의 명품, 철조비로나자불 좌상

보림사의 최고 명품 중 하나는 국보 제117호로 지정된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시대에 걸쳐 철을 재료로 만든 철불이 유행했는데, 이 불상은 신라 하대 철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앉은키 2.74미터, 무쇠를 녹여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주조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지방문화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불상을 올려놓은 대(臺)인 대좌와 불상 뒤에 있는 광명을 상징하는 장식인 광배는 없어졌지만, 부처의 몸인 불신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철불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불상 왼쪽 팔꿈치 위쪽에 새겨진 8행 60여 자의 글씨 때문이다. 이는 제작 연대와 제작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철불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當成佛時釋迦如來入滅後 一千八百八年耳 此時情王卽位三年也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七日武州長沙副官金邃宗聞奏 情王▢八月廿二日勅下令▢躬作不覺勞困也"

해석하면 이렇다. "불상을 조성한 시기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헌안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인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아뢰자, 정왕은 대중 8월 22일 칙서를 내렸는데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였다.

명문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제작자는 무주 장사현(현 고창 일대) 부관인 김수종이고, 김수종이 헌안왕 2년(858)에 주조를 청하여 승낙을 받고 이듬해인 헌안왕 3년(859)에 주조했다는 것이다. 명문에 나오는 대중(大中)은 당나라 선종의 연호로 대중 12년은 858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보림사 보조선사탑비문에는 헌안왕 4년(860) 김언경이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성의 시작은 김수종이 하였고 완성은 김언경이 하였다는 설과, 김수종과 김언경이 같은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또 불상 명문의 헌안왕 3년은 거푸집을 만든 시기로 조성이 시작된 연대이고, 탑 비문에 새겨진 헌안왕 4년은 철불의 완성 연도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불상의 조성자가 김수종인지 김언경인지, 아니면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성 시점은 859년 혹은 860년임은 확실해 보인다.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자. 불상의 신체는 각각 따로 주조한 뒤 접합하여 만들어졌다. 육계와 나발, 얼굴이 다른 신체에 비해 크게 주조되었고 손은 작게 표현되었다. 또한, 가부좌한 다리는 어깨에 비해 넓게 만들어져 전체적인 균형이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두툼한 입술, 커다란 귀 등에서 부처의 위엄이 느껴지며 세부 표현이 안정적이다. 법의는 통견형(通肩形)으로 양어깨를 감싸 내려와 가슴에서 V자를 이루고 있다. 작게 표현된 손은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쥐어 비로나자불의 수인인 지권인(智拳印, 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을 취하고 있다.

국보 제44호, 석탑과 석등

비로나자불을 모신 대적광전 앞의 국보 제44호인 석탑과 석등도 명품이다. 석탑은 쌍탑으로 제작되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통일신라 탑의 특징인 2중 기단을 갖춘 3층 탑이지만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다. 1933년 사리장치를 노린 도굴꾼의 도굴로 탑이 무너졌을 때, 1층 탑신부 사리구멍에서 사리와 함께 조성 내용이 기록된 탑지(塔誌)가 나와 경문왕 10년(87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국보 제117호인 철조 비로나자불의 조성 연대가 860년경이니, 철불이 만들어진 후 석탑과 석등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쌍둥이 탑 중 남탑은 5.4미터, 북탑은 5.9미터다. 북탑이 조금 큰데, 이는 육안으로도 확인된다. 왜 두 탑의 크기가 다를까? 이유는 보륜의 숫자 때문이다. 원래 남탑과 북탑의 보륜은 각각 4개씩이었다. 이는 1930년대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사진을 통해 확인된다. 1933년 도굴꾼에 의해 탑이 훼손되고, 1934년 일제에 의해 복원되면서 남탑은 보륜이 1개 줄어든 3개로, 북탑은 1개 늘어난 5개로 원형과 다르게 복원된다.

남북 석탑의 보륜 숫자가 달라지면서 보림사 석탑은 쌍둥이 탑임에도 불구하고 높이와 비례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처음 건립했던 쌍둥이 탑은 천년이 넘은 세월 동안 똑같은 크기로 함께 서 있었는데, 참 어처구니 없는 엉터리 복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 두 탑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건 국보로 지정된 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임무는 아닐까 싶다.

남탑과 북탑 사이에 서 있는 석등의 모습도 쌍탑처럼 건립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석등에 새겨진 안상(眼象)이나 연꽃잎, 지붕돌에 새긴 귀꽃 등의 장식도 수준급이다.

신라 말 제작된 국보 제44호인 석탑과 석등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고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한국 석탑과 석등의 기준이 되는 정말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9세기 불교미술의 기준 장흥 보림사

보림사, 현장을 찾다

필자와 보림사는 꽤 인연이 깊다.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진학한 후 첫 답사지가 보림사였기 때문이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지금은 광주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이지만, 당시 학교 버스를 타고 올 때는 꾸불꾸불한 국도를 따라 3시간 정도 걸렸던 기억이 난다. 보림사를 첫 답사지로 선택한 것은 신라 하대에 유행한 선종 9산 중 가장 먼저 가지산문이 형성된 선종의 종찰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지산문을 연 보조선사 체징의 무덤인 승탑 앞에서 열강하던 김두진 교수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가지산 보림사'란 편액을 단 외호문(外護門)과 목조사천왕상(보물 제1254호)을 보관하고 있는 사천문을 지나면 바로 보림사 경내다. 보통 산사의 경우 경내에 진입 전 2층의 루가 있는데, 보림사에는 없다. 루(樓)는 스님들의 휴식 장소이기도 하지만, 바로 정면의 지존인 부처님을 뵙기 전 머리를 숙이라는 의미도 있다. 대신, 평지 사찰인 보림사는 일주문 격인 외호문에서 쳐다보았을 때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바로 볼 수 없게 약간 비뚤어 배치했다. 외호문, 사천문, 대적광전이 일직선이 아닌 이유다.

경내에 들어서면 사천문과 일직선상에 비로자나불(국보 제117호)을 모신 대적광전이 있고, 오른쪽에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절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을 대웅(보)전이라고 하지만, 이 대웅보전은 대적광전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대적광전과 대웅보전은 둘 다 당시의 건물이 아닌 최근 들어 복원된 것이다.

그중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2층의 법당으로, 한국 전쟁 이전에는 국보 제204호로 지정된 '귀하신 몸'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당시 보림사에 인민군 유격대가 머물렀다는 이유로 군경토벌대가 사찰에 불을 질렀고, 이때 수많은 건물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만다. 국보 제204호였던 보림사 대웅보전도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주본'이 국보 제204호로 대신 지정되면서, 대웅보전은 기억에서마저 사라진다. 오늘 옛 모습으로 복원했지만, 수백 년 역사를 품은 옛 모습의 맛이 나질 않는다.

대웅보전 오른쪽 명부전 뒤 담장 안에는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과 탑비가 서 있다.

체징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헌강왕은 스님에게 보조(普照)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리탑의 이름은 창성(彰聖)이라 지어주며, 김영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보조'는 '두루 비춘다'는 뜻이고, '창성'은 '성스러움을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비문의 글씨는 일곱 번째 줄의 선(禪)까지는 김원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로는 김언경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써 놓은 비문을 필자는 본적이 없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와 보조선사의 생애를 기록한 몸돌의 비신,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새긴 머릿돌인 이수가 완벽한 형태로 남아 1,200년의 세월을 이겨내 왔다. 보조선사 탑비(보물 제158호)가 보물로 지정된 이유다.

보조선사 탑비 옆에는 그의 사리를 모신 무덤인 보조선사 승탑(보물 제157호)이 있다. 보조선사 창성탑이라고도 불리는 체징 스님의 승탑은 9세기 팔각원당형의 전형을 보여준다. 창성탑은 당당하고 장식 문양도 정교하여 승탑의 장자다운 기품과 근엄함이 엿보인다.

몸돌인 탑신 앞면과 뒷면에는 문짝인 문비(門扉)가, 그 사이에는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문짝 안에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가 있고, 사천왕은 보조선사를 지키는 수호신인 셈이다. 마치 사찰 입구에 사천왕이 서 있는 것과 같은 구조다.

승탑은 보조선사 체징이 입적 후 4년이 되는 884년 건립된 탑으로, 오늘 거의 완벽하게 남아 전하고 있다. 단지 머릿돌의 처마 부분이 조금 파손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안타까운 것은 승탑에 남아 있는 한국 전쟁의 상흔이다. 승탑에도 총알 자국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옆의 보조선사탑비에도 있다. 총알 자국은 보림사가 한국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 현장임을 보여준다. 한국 전쟁 당시 국보였던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고, 탑비와 승탑마저 또 총에 맞은 것이다.

동국 선종의 종찰 장흥 보림사는 1,200년을 지내오면서 한국 전쟁의 아픔까지도 함께 품고 있다.

국보 117호 보림사 비로자나불

보림사 외호문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