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산동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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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산동애가
  • 입력 : 2020. 06.03(수) 14:01
  • 편집에디터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마을 산동애가 노래비-구례군청 제공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리 머리 들어오는(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근자에 알려진 비운의 노래 '산동애가(山洞哀歌)', 명창 전인삼이 여수 부르스를 포함해 창조(昌調)로 불러 그 선율을 더욱 유장하게 했다. 김원중 등이 참여하여 발간한 한정판 음반이다. 1절과 2절 사이에 토해 내는 대사가 마치 대마디 대장단의 아니리처럼 정수리로부터 늑골을 따라 흐른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정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하고(산수유 열매 따서 부모효성 잘못하고)/ 가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꽃이 지면 다시 피고 겨울가면 봄은 오건만 이내몸 인제가면 언제 돌아올거나)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이 곡은 이보다 10여년 앞선 2001년 6월 26일 여수MBC 창사 3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기획 김재권 연출 김남태)에서 '부용산', '맹세하는 깃발' 등과 함께 소개되었다.

열아홉 산동처녀 백부전(순례)의 애사(哀史)

여수MBC 다큐를 리뷰해 본다. 2001년 당시 62세였던 홍순례의 구술이다. "시집와서 들으니까 아가씨(백순례)가 모략에 의해서 죽었는데, 이쁘고 똑똑해서 (군인들이) 죽이기가 아깝다고 했다더라. 끌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또 한 할머니가 덧붙인다. "잡혀갈 때 노래가 나왔을 거시. 죽은 무덤가서 노래가 나왔다고." 여순사건으로 오빠를 잃었다는 구연자 홍순례씨는 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만다. 백순례의 조카 백정규의 구술은 노래보다 더 애절하다. "백부님이 끌려가서 죽게 되었는데, 고모님(백순례)이 말하기를, 그래도 집안을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나까지는 죽어도 좋으니까 막내오빠만은 살려달라 애원을 해가지고, 사실은 우리가(백정규 등) 여기 있습니다." 진압군에 의해 끌려가 죽을 막내오빠를 살려내고 대신 잡혀가 죽은 백순례에 대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카가 보관하고 있는 (백순례의) 큰오빠 결혼 기념사진에 찍힌 가족들의 시선이 아리다. 그저 무심히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들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가운데 어머니를 중심으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징용 나가 사망한 큰오빠,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처형당한 둘째 오빠, 6.25때 행방불명된 언니, 자기 대신 죽은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린 막내오빠 등이다. 사진의 맨 왼쪽이 백순례인데, 노리개처럼 이쁘다 하여 아예 백부전으로 불렸다. 부전은 색 헝겊을 둥근 모양이나 병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 쪽을 맞대고 수를 놓기도 하고 다른 헝겊으로 알록달록하게 대기도 하여 끈을 매 차고 다니던 여자 아이들의 노리개를 말한다. 조카며느리 박씨의 진술에 의하면 1987년 사망한 어머니 고씨가 치매를 앓을 때 증손녀를 '부전아, 부전아!'하고 부르시곤 했다더라. 치매에 들어서야 막내딸의 환영을 소환한 어머니의 무의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여순항쟁과 절명의 노래

산동애가는 누가 지었을까? 여수MBC 다큐에서는 구례산동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거나 회피하던 노래를 홍순례의 구연을 통해 녹음할 수 있었고 이후 작곡가 이호섭이 편곡하여 복원하게 되었다 한다. 열아홉 백부전이 끌려가면서 지어 불렀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주철희의 연구에 의하면 여순 당시 경찰신분이던 정성수가 퇴임 후 1961년에 백씨의 애달픈 사연을 담아 작사를 하고 김부해가 곡을 붙인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지화자가 부른 마디마디가 간장을 도려낸다. 이후 금지곡이 되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홍순례의 구연을 통해 다시 소환된 셈이다. 노래의 소재이자 배경이었던 백순례가 지어 불렀다고 와전된 것은 망각의 간극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전형적인 트로트 계열의 곡인 까닭에 <부용산>처럼 가곡(歌曲)의 풍류가 보이지도 않고 한자 조어를 남발하는 가사(歌詞)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가슴에 쌓인 울분이나 한을 어찌어찌 풀어내는 우리네 민중들의 정서를 올곧이 담아냈기 때문이리라. 트로트를 얕잡아보거나 애써 전통음악과 변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노래일수 있다. 하지만 노래 속에 담긴 내력을 훑어가다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斷腸)을 넘어 숨이 끊어지는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어찌 선율의 유장과 리듬의 견고만을 들어 노래의 경중을 토로하겠는가. 국민가수가 된 송가인의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포섭하는 실상을 보라.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하는 굴절된 역사가,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의 행간에 겹겹이 쌓여 있지 않은가. 산동애가는 바로 그런 노래다. 작사하고 작곡한 사람이 있지만 민중의 역사를 올곧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민요라 할 수 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시경 이래의 전통을 추적해 그 의미를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여순사건, 반란인가 항명인가 민중항쟁인가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를 펴낸 도올 김용옥의 고백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 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서북청년회)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있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반란-항명-항쟁으로 인식의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철희도 여순항쟁으로 호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옳게 정하는 것을 정명(正名)이라 한다. 명칭이 실재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당한 호명을 하려면 이런 주장들을 수용해야할까? 위키백과는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군경에 의해 2,50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왕의 '반란'이라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상들이 밝혀졌고 지금도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주철희는 여순항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948년 10윌 19일부터 지리산 빨치산 토벌이 완료된 1955년 4월 1일까지를 포함해야하고 특히 4천명에서 5천명까지 전국의 감옥에 흩어져 수감되었던 관련자들이 6.25가 발발하면서 처형당하였으므로 이 숫자를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2만에서 3만에 이른다는 제주 4.3 희생자 숫자에 육박하는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도올이 책 제목을 '우린 너무 몰랐다'라고 지은 까닭이기도 하다. 비로소 연구가 시작되었으니 실상들이 더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잃어버린 역사, 부용산에서 산동애가까지

벌교와 목포 사람들은 은연중 부용산을 애창하곤 했다. 부용산을 모르면 벌교나 목포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목포항도여중에 근무하던 벌교사람 박기동 때문일까,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나주사람 안성현 때문일까. 구례사람들 나아가 여순 사람들에게는 산동애가가 그러할까? 사실은 노래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애써 잊으려 노력해왔던 굴곡의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불온한 시대는 애창은커녕 발설 자체를 금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연구들에 의해 실상이 밝혀지고, 세상 또한 개명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목 놓아 불러도 좋을 시절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절명가인 산동애가의 가사는 어딘지 모르게 부용산을 빼닮았다. 스물 안팎의 누이들이 대상이라는 점이 그렇고 비운에 죽은 청춘들이라는 점이 그러하며 지리산의 흉중을 횡단한다는 점이 그렇다. 어찌 노고단의 계곡이며 벌교의 들판이며 목포의 부잔교들뿐이겠는가. 고깃배 가득하던 여수앞바다며 순천의 들녘이며 아니 남도 천지의 올망졸망한 터전들뿐이겠는가. 미처 못다 부른 절명의 풍경들이 산동애가의 행간에 가득 찬 것을 그 누구라고 보지 못하랴. 시대의 무엇이 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때때로 대신 죽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는가. 문제는 지금부터다. 다시 아린 눈으로 백부전의 가족사진을 본다. 무심한 듯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일지 모른다. 이름도 빛도 없이 집단 매장된 무덤가를 흐르는 노래일지 모른다.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피해자들에 비해 소수이지만 가해자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상생과 화합을 앞세우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이제는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대응을 해가는 일들이 남아있다. 지금 부용산 봉우리엔 하늘만 푸르러푸르러 있고 산수유 진 지리산 산동에는 무심한 녹음만 우거져 있다.

남도인문학팁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지난 2020년 1월 20일 광주지방법원순천지원에서 괄목할 만한 뉴스가 터졌다. 여순항쟁 당시 사형당한 철도원 고 장봉환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던 것이다. 72년만이었다. 이 선고가 포섭하는 맥락들 예컨대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6.·25한국전쟁 70주년, 그리고 여수·순천 10·19사건 발생 72주년이라는 기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여순사건은 '국가공권력이 재판을 빙자해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임을 공식화 한 판결이다. 당시 여순 사람들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동시에 보관하고 살았다 한다. 생존을 위한 전략에 앞서 이념과는 무관한 장삼이사 민중이었다는 뜻이다. 산동애가를 가곡이나 시조로 읊지 않고 트로트로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전남도의회 강정희 의원의 건의로 촉발된 일련의 활동들과 특별법 관련 상황이 고무적이다. 여순사건 진실 바로 알리기를 위한 역사 교육이나 유적지 관리, 정비사업 혹은 민관협의회 구성을 비롯해 연구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도 16대 국회 때부터 발의된 여순사건특별법은 국회에서 자동폐기와 계류가 반복되면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강의원은 다시 21대 국회 제1호 법안 제정촉구 건의안을 전남도 제342회 임시회에 제출하였다. 이제는 국회가 대답할 차례다.

산동애가의 주인공 백순례(백부전)

산동애가의 주인공 백순례의 가족사진-맨왼쪽이 백순례

지리산 노고단 풍경. 구례군청 제공

지리산 노고단 풍경. 구례군청 제공

지리산 노고단 풍경. 구례군청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