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박관서>'무안인문학 아카데미'에 거는 기대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문화향기·박관서>'무안인문학 아카데미'에 거는 기대
박관서-시인
  • 입력 : 2020. 06.09(화) 13:23
  • 편집에디터
'물가에 흰 모레는 밝은 달빛에 물들었다(水白沙明月色停)/가는 물결은 찰랑대면서 낯선 정자를 떠나려 한다(微波搖漾蘸新停)/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여러 번 된다 한들 어찌하랴(滄桑累變邱陵在)/석마는 소리 없고 잡초만 푸르도다(石馬無聲草自靑)'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무안군지(務安郡誌·1922년 간행)'에 나오는 한 편의 시문으로 시작한 무안인문학 아카데미는, 무안문화원 주관으로 지난주 목요일 시작해 앞으로 4개월 동안 진행된다.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임에도 무안지역 원근에서 3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멀리해야 하는 몸에 비해 마음은 더욱 깊이 어우러지질 터이고, 마음의 만남은 함부로 이뤄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세계는 다시 옛 선인들의 이야기는 물론 자연 만물의 원리와 이치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인문학적 르네상스의 도래에 접응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할 수 있겠다.

서두에 소개된 시는 '관해루(觀海樓):박곡면에 있다. 시인 진한장이 선산 아래 집을 지어 아버지를 생각하며 강학했다. 후손인 병영이 시로 표현했다'는 설명으로 봐서 관해루라는 정자의 현판으로 보존된 시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 무안군 몽탄면을 가리키는 박곡면에는 영산강이 흐르는 데 웬 바다를 바라보는 누각(觀海樓)이란 말일까. 거기에 '바다가 변해 뽕밭이 된다'는 표현을 보면 영락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정자의 누각임이 틀림없다.

어렵게 찾아본 당시의 지도를 통해 확인한 영산강은 남해만이라는 바다였다. 남해만의 위쪽 함평만 어름에는 전라수영(全羅水營)이 있었고 영암 방향 시종면에는 나라에서 바다를 향해 매년 제사를 지내던 남해신당(南海神堂)이 있던 큰 바다이자 서남해를 관리하는 근거지였다. 낮아진 수위와 간척, 1970년대 말 영산강 하구둑이 생기면서 볼품없는 내륙의 강줄기가 돼기 전에는 말이다.

그제야, 지금으로부터 약 5~6m 높은 수위에 더해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면서 토해놓는 흰 모래사장을 물들이는 밝은 달빛에 기대어 돌아가신 아버지와 허망한 삶의 심연을 바라보는 옛 시인의 심사가 느껴진다. 동시에, 좁은 곡강인 늘어지를 휘어 돌아 들이치는 몽탄강과 나주 공산평야에서 밀려온 삼포강이 만나서 펼쳐지는 드넓은 남해만 바다의 드물머리에서 민물과 갯물이 만나 펼쳐지는 물살과 안개와 지형의 변화가 그대로, 천년 전 거슬러 올라 왕건과 견훤의 쟁패에 꿈속 노인으로 끼어들어 몽탄(夢灘)이라는 파란 깃든 지명을 얻는 연유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백제시대에 이르러 공식 지명으로 처음 등장하는 무안의 옛 지명인 '물아혜현'이 무안반도 옆 남해만에 더해 위쪽의 함평만까지를 고려하면 거의 사면이 '물 안에 있는 고을' 또는 '물 아래 있는 고을'을 뜻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밀물이 차오르면 바다가 되고 썰물로 빠지면 육지가 되는 갯벌이나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사는 생물의 특성은 그대로 공간의 역사가 되면서 유전체의 원형질이 됐을 터다.

부드러움 속에 단단하지만 가벼운 껍질들은 항상 밖에서 다가오는 힘에 재빨리 피하거나 피할 수 없으면 생과 사를 넘어서는 불립문자의 힘으로 맞섰다. 중앙 권력이 아니라 강고한 외세에도 항복이나 복속은커녕 별다른 타협도 고려하지 않았다. 백제시대를 넘어서도록 복속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임소반국(臨素半國)이나 신미제국(新彌諸國)이 그렇고 후삼국 통일기 역시 견훤의 후백제나 궁예의 후고구려에도 복속되려 하지 않았다.

당대의 힘이 확인되는 고려에 스스로 귀속하는 나주 호족에 비해 체포된 후 궁예의 도성인 강원도 철원까지 붙잡혀 가 분노한 궁예의 침세례를 받으며 참수돼 죽으면서도 귀속이나 항복의 권유를 뿌리친 수달장군 능창의 정신 역시 여기에서 비롯됐음다. 시정과 세속을 멀리하면서 일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청담이나 일개 임금에게 바치는 충성이 절의가 될 수 없다는 '배절의론(背節義論)'을 펼침에 더해 온갖 벼슬길을 멀리하면서, 강호가도를 추구하며 연군지사를 지어 부르는 송강 정철을 비난하다 끝내 죽임을 당한 곤재 정개청의 절의와 자주정신은 무안 정신의 원형질이자 정체성의 중심이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무안이라는 지역 공간에 형성된 정신이라 함은 현재의 행정 구도에서가 아니라 수천 년 아니 수수만년 이어져 내려오면서 체적되고 착종 되면서 주위로 번져가고 습합돼 형성된 남도 정신의 한 요체를 일컬음에 다름아니다.

누구도 봐주지 않던 지역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의 행간을 찾아 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영감의 흔적에 잇대어 구성되는 인문학적 맥락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고 새로이 나아가야 할 시대적 가치를 찾아보고자 진행되는 무안인문학 아카데미의 시도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