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등장한 대남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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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재등장한 대남확성기
  • 입력 : 2020. 06.23(화) 17:30
  • 박상수 기자

기원전 202년 해하에서 벌어진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 초나라 패왕 항우는 한나라의 명장 한신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하고 만다.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다. 한나라가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가뜩이나 고달픈 초나라 병사들은 구슬픈 고향 노래에 사기를 잃고 전의마저 상실한다. 초나라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안 항우는 탄식을 하고 총애하던 우미인과 함께 자결한다.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고사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항우는 한나라군의 고도의 심리전에 당했다.

현대전에서도 심리전은 널리 활용돼 왔다. 한국전쟁에서는 남북이 심리전 전단지인 '삐라'를 대거 뿌렸다. 유엔군은 승전 소식과 함께 '안전보장증'을 날려 보내 인민군에게 자유로운 남쪽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중공군이 참전하자, 전장에서 죽어가는 인민군과 달리 중공군은 후방에서 놀고먹으며 아내와 누이를 능욕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25억 장, 북한 인민군은 3억 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한다. 남북은 휴전 후에도 서로를 비난하는 삐라를 날리며 체제 대결을 벌였다.

남북이 휴전선 일대에 확성기를 설치한 것도 심리전의 일환이다. 북한은 1962년부터 대남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고 최전방 근무 군인들의 월북 등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남한도 여기에 맞대응해 1963년 5월 1일 대북확성기 방송을 시작한다. 1980년대 초반 DMZ에 근무한 친구들에 따르면 남북 군인들은 가끔 확성기를 통해 대화를 하고 욕설도 하고 장기자랑 대결도 벌였다고 한다. 북한은 40여 대의 고정확성기, 남한은 이동형 10여 대와 고정형 30여 대 등 40여 대의 확성기를 사용했다. 우리 군에서는 대북 심리전단이 이를 담당했다. 남북 관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던 확성기는 지난 2018년 4·27 판문점 회담을 전후해 방송을 중단하고 철거됐다.

북한이 22일 남북 접경지역 여러 곳에서 대남확성기를 다시 설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군의 대응이 주목된다. 조용하던 비무장지대가 다시 시끄러워지고 노루나 고라니도 놀라서 귀를 쫑긋 세울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중단했던 삐라도 다시 뿌릴 태세다. 남북 관계의 시계가 과거 냉전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21세기 첨단시대에 남북이 유치한 놀음을 계속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상수 주필 sspark@jnilbo.com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