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임방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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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임방울의 추억
  • 입력 : 2020. 07.08(수) 14:00
  • 편집에디터

10대 후반의 임방울(흰두루마기)-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데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데라고 그리 쉽게 가럇던가/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나 말았거나/ 왔다 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들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은 하직코 가셨지만/ 이승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한들/ 보러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보리오/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전생에 무슨 혐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 각읍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속에 들어도 나는 못잊겠네/ 원명이 그뿐이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어데로 가고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저 유명한 임방울의 단가 '추억'이다. 임방울의 평생 히트곡을 두 곡만 들라면 첫째가 '쑥대머리'요 둘째가 '추억'일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노래다. 세월이 무심해서일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애창되었던 이 노래는 오랫동안 잊혀진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근자에 이런저런 판소리꾼들이 다시 부르는 풍경들을 접하게 되어 고무적이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중 옥중 장면을 노래한 것이니 누구나 아는 이야기인데 '추억'은 어떤 노래일까?

임방울과 김산호주의 순애보(殉愛譜) 러브 스토리

천이두의'명창 임방울'(위대한 한국인7, 한길사, 1998)에 나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광산 김씨네 농가로 거슬러 오른다. 임방울이 고용살이를 했던 것일까? 주인집 딸 산호가 등장한다. 방울과는 동갑내기, 소리꾼으로 성공하지 못한 채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 임경학이 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고용살이를 보낸 풍경이 묘사된다. 여차여차하여 방울은 산호네 집을 떠나게 되고 박재실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한다. 박재실은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등 당대의 최고 소리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선생이다. 시대의 요청이었을까. 임방울은 공창식 등 선생들에게 사사받으며, 타고난 천구성과 수리성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각종 레코드 취입은 물론 전국 순회공연을 도맡아 하던 때의 대표곡이 쑥대머리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웅얼거렸을 노래 쑥대머리의 유행을 일제강점기의 나라 잃은 풍경에 대입해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이몽룡을 기다리던 옥중 춘향이의 심정이, 광복을 기다리던 조선 사람들 마음의 투사라는 뜻이다. 이 상실감의 정서는 해방이 되고나서도 이어진다. 어쨌든 대성공을 거둔 방울이 고향으로 돌아와 연인 산호주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순애보의 레퍼토리가 작동된다. 각기 혼인한 사이지만 사랑했던 연인,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을 운영하던 산호는 이미 병들어 있다. 문순태 등이 채집한 정보를 보태면, 임방울은 산호주와의 사랑을 뿌리치고 동굴에서 소리를 연마해 성공한다. 판소리 예술을 위해 산호주를 거부한 셈이다.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들 속에 러브스토리의 결말이 애처롭다. 결국 산호가 임방울을 연모하며 죽었다는 것 아닌가. 천이두가 쓴 임방울 전기는 사실일까 소설일까. 내용 전반이 산호와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측면을 보면 소설에 더 가깝다. 김산호주와의 러브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생 월향에서 송학원 김산호주까지

<사단법인 임방울국악진흥회>에서는 산호주와의 러브스토리를 임방울의 생애사로 공식화하고 있다. 임방울이 일약 스타로 등장하자 고향인 광주의 송학원에서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었고 여기서 소년시절의 연인 김산호주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요릿집 송학원은 결혼생활을 청산한 산호주가 운영하고 있었다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연정이 불타올라 두문불출 2년여를 함께 지내게 된다. 전속계약을 한 레코드사에서 난리가 났겠다. 이내 선천적인 목조차 상하게 되자 낙심한 방울은 지리산 토굴로 독공에 들어간다. 그리움에 사무친 산호주가 수소문하여 찾아가지만 방울은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깊은 병에 든 산호주가 죽게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고, 애달픈 마음으로 '추억'을 지어 불렀다는 것 아닌가. 천이두의 주장대로라면 이 사건 이후부터 추억은 쑥대머리와 거의 유사한 빈도의 레퍼토리가 된다. 진흥회에서 공식화한 '추억'의 녹음은 1930년 콜롬비아 레코드이고, 1933년 오케 레코드에서는 추억(亡妻를 생각함)이라는 제목으로 김종기가 장고 반주를 한다. 최동현의 연구에 의하면 '추억'의 첫 음반은 단가 '편시춘'과 함께 1932년 10월 콜롬비아에서 발매된다(Columbia 40370). 1934년 1월 시에론(Chieron 151)에서는 '사망처(죽은 아내를 생각함)'로 발매되었고 1934년 2월 오케에서 발매한 '추억'에는 '작사 임방울'이라는 표기가 있다. 문제는 최동현의 지적처럼 '사망친난 단가'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죽음을 애달파한 이 노래가 추억과 유사하다는 것이 쟁점이다. 한편 문순태의 <팔도명인전>(전남매일신문, 1975. 12월)에 의하면 임방울이 유성준 문하에서 공부하던 시절 화순의 여섯 살 연상 월향이라는 기생과 사랑을 하게 된다. 눈치 챈 유성준에게 야단을 맞고 지리산 토굴로 들어가 독공을 하여 본인 스타일의 소리를 완성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임방울이 열네 살 무렵 스승으로 모시는 공창식의 스토리 또한 유사하다는 점이다.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 등의 서편제 소리를 계승한 공창식이 인기를 독점할 무렵, 어느 재상의 첩이던 보영이라는 여자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랑의 농도가 너무 심하였던지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다. 이후 능주로 내려오게 되었고, 보영으로부터 맨발로 도망쳐 나왔다 해서 '맨발의 공선생'으로 불려졌다 한다. 모두 김산호주 스토리와 같은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송학원 주인이었다는 김산호주가 어린 시절 연인이었는지 장성하여 맺은 인연인지, 본명이 아닌 기명(妓名)인지, 월향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명한 소리꾼들은 모두 망처가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임방울의 여성편력을 일정한 서사에 얹어 스토리텔링한 것일까? 임방울이 유명해지자 후대의 누군가가 각색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서가 사실은 대표곡 쑥대머리와 상통한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원한 라이벌 김연수와 임방울의 소리세계

판소리 단가(短歌)가 중모리장단으로 구성된 것에 비하면 추억은 진양조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소절만 중모리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단가라 아니라는 뜻이다. 1929년 매일신보사 강당 내청각에서 열린 '조선명창대연주회'에 참석하여 <쑥대머리>를 부른 이후 임방울의 소리는 나라를 울리는 소리로 부상한다. 당시 120만 장의 음반이 팔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임방울의 목구성 자체가 남도의 계면조(서양음악으로 말하면 단조의 슬픈 소리)에 특화되어 있어서일까?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으로 해석되었던 이 정서는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정서라 말할 수 있다. 문학으로 말하면 고려가요 가시리에서 김소월의 시적 정조까지, 음악으로 말하면 남도의 대표곡 육자백이에서 연정을 노래한 각양의 트로트들까지 이어진다고나 할까. 비판받고 있기는 하지만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우리네 정서 자체를 '한(恨)'으로 표방했던 한 시기의 컨텍스트, 쑥대머리와 추억은 이러한 시대적 정서를 강하게 대변해주는 노래였다. 이보형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를 주목한 바 있다. 임방울의 추억은 사실 판소리 단가라기보다 어쩌면 육자백이에 가까운 노래일 수 있다. 망처의 정서가 그렇고 단조로우면서도 시김새를 강조하는 선율이 그러하며 진양조라는 장단이 또한 그러하다. 그렇기에 나는 임방울의 추억을 상실, 애환과 후회 혹은 기다림과 그리움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매우 오래된 서사라 해석하며 노래의 구성 또한 육자백이로부터 판소리로 이어지는 가장 오래된 장치라고 말해왔다.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했던 동초 김연수와 비교해보면 이 점이 더 명료해진다. 일제강점기 이후 가장 뚜렷한 판소리 창자로 존립한 두 거목의 소리세계가 이성과 감성, 이론과 예술 등 대칭구조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김혜정의 연구에 의하면 김연수는 분명한 악조의 선택과 성음의 표현, 분명한 가사전달과 너름새의 사용 등 판소리 이론에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반면 임방울은 당대의 대중들이 애호하는 계면조와 빠르고 흥겨운 속도감,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 구성 등 대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비교의 가부, 선악, 혹은 우위가 아니라 시대적 정서와 문화적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유성기 음반으로 대표되었던 오디오라는 기술이다. 1920년 7월 경성 라디오방송국의 개국과 1928년 이후 유성음반기의 발매가 판소리와 우리 노래역사에 끼쳤던 영향을 새삼 환기해본다. 사실 추억이나 쑥대머리는 이 기술에 기반한 대중음악의 큰 흐름이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했던 임방울의 추억으로부터 반세기를 훨씬 지난 오늘 유트브와 SNS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도도한 흐름들을 주목한다. 1세기 전의 오디오가 신기술이었듯 제4차산업혁명기의 흐름 또한 신기술에 기반해 있을 터인데, BTS(방탄소년단)의 부상이나 송가인의 트로트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말이다.

남도인문학팁

임방울의 생애

남도가 낳은 당대 최고의 명창 임방울의 생애를 '사단법인 임방울국악진흥회' 자료를 인용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1905년 4월 20일(호적 자료)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현 광주 광산구)에서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연구자에 따라 출생년도가 조금씩 다르거나 5남매, 8남매, 9남매 등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다. 어머니가 50이 넘어 낳았다고 해서 '쉰둥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방울방울 잘 논다 해서 '방울'이라 했다거나 임방울의 소리를 들은 어느 선생이 '너야말로 은방울이다'라고 해서 예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김종수와 혼인했다가 이혼했고 박오례와 혼인하여 임오희, 임순희, 임만택을 낳았으며 한애순과의 사이에 임달희, 전상순과의 사이에 임별희 등을 두었다. 협률사와 원각사의 감독이었던 김창환이 외삼촌이다. 1916년 박재실 창극단에 들어가 <흥보가>를, 1918년에는 공창식에게 소리를 배운다. 1921년 유성준에게 성원목, 조몽실, 오수암 등과 함께 적벽가와 수궁가를 배운다. 1922년에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고 1929년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명창의 반열에 오른다. 1933년 콜롬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1941년 오케이까지 많은 음반을 낸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활동했다. 동일극단 참여, 수궁가 완창, 적벽가 완창 등을 했고 노래를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투병 중 1961년 8일 서울 자택에서 운명했다.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룬 장례 풍경이 유명하다.

1930년대 임방울 명창의 공연 장면-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1986. 9. 12. 광산군 주관으로 세워진 송정읍 송정공원 임방울 기념비 제막식-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광주에서 명창대회를 마치고(가운데가 임방울)-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임방울 장례, 전국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하고 상여를 끌었다. 행렬이 2Km였다고 한다-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임방울의 영원한 라이벌 김연수(동초제 창시)-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임방울-천이두의 명창 임방울 중에서

2017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제25회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김연옥(광주)씨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광주시 제공

국악 신인 등용문인 제18회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가 2010년 9월3일 광주에서 개막한 가운데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순수 아마추어 판소리 애호가들이 기량을 겨루고 있다. 뉴시스

김미숙뿌리한국무용단은 2015년 광주전통문화관에서 국창(國唱) 임방울(1904~1961) 선생의 삶과 예술을 다룬 무용공연 '광(光). 7색(色) 7무(舞)-무돌을 춤추다'를 선보이고 있다. 김미숙뿌리한국무용단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