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호남 유일 문묘 배향자, 필암서원 하서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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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호남 유일 문묘 배향자, 필암서원 하서 김인후
장성군 황룡면 출생… 중종 35년 문과 급제||홍문관 박사 겸 세자 스승으로 인종 가르쳐 ||인종 재위 8개월만에 승하 을사사화 후 낙향||양자징 등 제자 양성, 시문 1600여 편 지어||하서 사후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묘에 배향
  • 입력 : 2020. 08.25(화) 17:14
  • 편집에디터

장성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장성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하서 김인후 영정

필암서원 경장각

묵죽도

필암서원 확연루

하서, 문묘에 배향되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문묘(文廟)다. 문묘에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열여덟 분이 중앙의 성균관을 비롯, 전국 향교의 문묘에 모셔져 있다. 그 열여덟 분을 '동방 18현'이라 부른다.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조광조·이이·이황·송시열 등이 이들인데, 호남 유일의 인물이 하서 김인후다.

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자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장성현 대맥동(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에서 참봉을 지낸 김령과 옥천조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호는 하서(河西),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6살 때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지극히 현묘한데, 넓고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혀 있는 그 가운데 만물이 다 들어가는데, 기(杞) 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던고"라는 '영천(詠天)'이란 제목의 시를 쓴다. 우주의 이치뿐만 아닌 기우(杞憂)의 고사마저 알고 있다.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복재 기준은 9살이던 하서를 만나 장차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예견한다. 10살 때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소학을 가르치고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다"라고 칭찬한다. 하서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중종 23년(1528)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다. 중종 35년(1540) 문과에 급제한 후 첫 관직이 승문원 부정자였다.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 저작이 된다. 중종 38년(1543)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후일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는다. 김인후가 인종과 맺은 첫 인연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기묘명현의 신원이 이뤄지지 않자, 부모 봉양을 핑계 삼아 옥과 현감으로 나간다.

세자시절 인연을 맺은 인종이 즉위 몇 달 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한 후 낙향한다. 명종은 몇 번이나 관직을 내려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절의 때문이었다.

이후 성리학을 연구하고, '소쇄영 48영', '면앙정 30영' 등 1,600여수의 시를 지었으며 변성온, 기효간, 조희문, 양자징 등 제자들을 길러낸다. 특히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한다. 그의 이론은 후일 기대승의 주기설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명종 15년(1560), 낙향한 지 15년여 만에 세상을 뜬다. 51세였다. 그의 사후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케 하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시호 문정(文靖)을 (文正)으로 바꾼다.

하서, 인종 임금을 그리워하다

하서는 문과에 급제한 3년 뒤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승진한 후 세자의 보도(輔導)로 임명된다. 보도란 지금의 선생, 즉 스승을 말한다. 인종의 스승이 된 것이다.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도덕의 훌륭함을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 대했고, 하서 역시 세자의 덕이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싶어 정성껏 이끈다. 둘은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하서가 입직한 날이면 세자가 몸소 나와 국정을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곤 했다.

세자의 하서 사랑은 대단했다. 그것을 보여준 사례가 묵죽과 『주자대전』의 하사였다. 세자는 예능에 소질이 있었다. 어느 날, 세자는 손수 그린 대나무 그림을 하사하고, 화축(畵軸)에 시를 쓰도록 한다. 하서는 묵죽에 다음의 시를 쓴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다 정미(精微)롭고, 굳은 돌은 벗인 양 범위 안에 들어 있네.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지으사,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시네."

그리고 배 3개를 내린다. 한 개를 맛보니 매우 달고 시원했다. 나머지 2개를 보물처럼 간직하였다가 부모님께 드리고, 배씨를 집 앞에 심는다. 이 배나무가 임금이 내린 배라는 뜻의 '어사리(御賜梨)'다. 이 배나무는 20미터가 넘게 커 지금도 열매를 맺는다.

인종은 구하기 힘든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내려주고 함께 술을 마시며 새 정치를 꿈꾼다.

인종의 하서에 대한 신뢰와 배려, 우러나는 하서의 충성심은 이후 군신 간의 모범 사례가 되어 인구에 회자 된다. 세자와 보도인 하서가 주고받음이 참으로 아름답다.

하서가 세자와 인연을 맺은 1년 뒤인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세자가 왕위에 오른다. 인종이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한다. 생모 장경왕후를 일주일 만에 여윈 비운의 군주 인종,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고 적혀 있다.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독살했다는 '독살설'이 나온 배경이다.

하서는 인종을 그리워하는 사모곡 '유소사(有所事)'를 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채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님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른 물처럼 잊혀지련만, 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 가을 몇 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 있다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는 옥과 현감을 끝으로 36살에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성균관 전적, 공조 정랑, 전라도사,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에 임명하여 불렀지만, 끝내 사양한다. 그는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까지 남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바로 하서였다.

인종에 대한 그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 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 통곡했다. 지금 난산 정상에 통곡단이 건립되어 있고, 통곡단 입구에는 이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가 있다. 제자인 송강 정철이 그 모습을 시로 남겼는데, 편액이 필암서원 청절당에 걸려있다. "동방에는 출처(사람의 처서) 잘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다네."

하서는 도학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는 이런 하서를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온 뒤의 달"이라고 평하였다. 하서가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필암서원 현판

세계문화유산, 장성 필암서원을 찾다

장성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장성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서원 입구에 서 있는 세계문화유산 표지판은, 오늘 필암서원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필암서원은 김인후 사후 30년 뒤인 1590년 그의 제자였던 변성온·기효간 등 호남 선비들이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한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후 1624년 기산리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다시 세워지고, 현종 3년(1662) 필암서원으로 사액된다. 현종 13년(1672)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겨오면서 마을 이름도 필암리로 바뀐다.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루가 휴식공간 확연루(廓然樓)다. '확연'은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며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취한 말이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글씨가 크고 호방한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루를 지나면 강학 공간(학교)이 나오고,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 청절당(淸節堂)과 만난다. 편액 청절당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인데 또 무슨 뜻일까? 우암 송시열이 쓴 김인후의 신도비문에 나오는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청풍은 '부드럽고 맑게 부른 바람'이라는 뜻이고, 대절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하서의 인품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 병계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의 사액 현판도 걸려있다. 청절당 안에는 백록동 학규를 비롯 정조대왕의 어제 사제문과 고경명·정철 등의 시를 새긴 현판들도 즐비하게 걸려있다.

청절당 좌우는 유생들의 거처지인 동·서재다. 동재인 진덕재(進德齋)는 선배들이, 서재인 숭의재(崇義齋)는 후배들이 기거하던 일종의 기숙사로, 선후배의 위계를 엿볼 수 있다.

청절당 안에는 인종이 세자시절 손수 그려 하서에게 준 '묵죽(墨竹)' 그림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경장각(經藏閣)이 있는데, 주위 건물과는 품격이 다르다. 일반 서원과 어울리지 않게 3마리의 용머리와 국화문양이 조각된 주심포집 3칸의 팔작지붕 집이기 때문이다. 경장각 건물에 용과 국화문양이 조각될 수 있었던 것은 인종의 유품인 어제(御製) 묵죽과 관련이 있다. 멋드러진 경장각 편액의 글씨도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경장각을 지나 내삼문 안을 들어가면 제사 공간이 나오고, 필암서원의 주인공인 하서 김인후와 제자이면서 사위인 양자징의 신위를 모신 사당 우동사(祐東祀)가 있다. 또 우동의 뜻은 무엇일까? 우동의 의미도 송시열이 쓴 신도비명 중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인후 선생을 태어나게 하였다." 동방의 '동'자와 돕다의 '우'자를 취한 것인데, 편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편액 하나하나의 뜻이 정말 깊다.

이외에도 필암서원에 들르면 꼭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기숙사였던 진덕재 앞에는 계생비(繫牲碑)가 서 있는데, 봄과 가을 제사 때 사용하는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묶어놓고 검사하는 곳이다. 토담 동쪽 밖에는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고, 장판각 옆 동쪽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汗丈舍)가, 우동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왼쪽에는 춘·추향제를 준비하는 전사청도 있다.

필암서원과 멀지 않은 황룡면 맥호리 맥동 마을에는 하서가 태어난 백화정이 있고, 백화정 입구에는 '문정공하서김선생유허비'도 서 있다. 이미 언급한 어사리도 집 옆에 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오른쪽에 그의 삶을 정리한 신도비가 있고, 그의 무덤이 난산을 바라보며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 신도비가 두 개다.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영조 18년(1742)에 세웠는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10년 걸려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1982년 건립된 신도비가 또 있다. 다시 세웠던 것은, 처음 세워진 신도비는 정조대왕이 하교한 문묘 배향 및 영의정 증직, 시호 문정(文正, 처음 시호는 文靖) 한자 변경 등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문묘 배향 이야기가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을 입구 쪽에는 하서 김인후라는 인물이 있게 한 자연물, 筆巖(필암)이라 새겨진 붓바위가 있는데, 생각보다 조그마했다.

마을 앞 계란 모양의 난산에는 인종의 기일만 되면 통곡했던 장소에 통곡단과 그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가 서 있다. 난산비와 통곡단에는 인종을 그리워하는 하서의 마음이 애절하게 묻어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