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34> 카데시 조약이 오늘날 의미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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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34> 카데시 조약이 오늘날 의미 하는 것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 입력 : 2020. 08.27(목) 13:46
  • 편집에디터

35-1. 카파도키아 기암괴석 위로 열기구가 날아가는 장면이다. 1인당 200유로 정도이다. 시간은 5시 30분부터 9시까지(이동시간 포함, 열기구 타는 시간은 30분 정도)이다.

1. 명마의 도시 카파도키아

약 3백만 년 전, 3,916m에 이르는 에르지에스 화산이 폭발한다. 어찌나 그 위력이 대단했던지 폼페이 열 배인 200m 화산재로 그 근방을 완전히 덮고도 모자라, 앙카라까지 날아간다. 화산재는 바닷물과 섞여 응고하기 시작한다. 그 위로 용암이 흘러서 굳는다. 화산 폭발 뒤 빙하기가 찾아오더니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는 대홍수가 난다.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고 무시무시한 무게와 속도로 빙하가 쓸려가면서 땅을 깎아내린다. 그 자리에 협곡이 생긴다. 협곡은 긴 세월 동안 풍화작용으로 깎이고 깎여 기이한 바위산을 만들어낸다. 버섯 모양 같기도 하고 동물 모양 같기도 한 그것은 용암의 온도에 따라 하얀색(가장 높은 온도), 붉은색(중간 온도), 노란색(가장 낮은 온도)으로 변화를 주기까지 한다. 기이한 암벽이 부드럽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곳을 파서 주거 공간으로 활용한다. 유난히 춥고 더운 겨울과 여름을 견디기에 암굴 속은 적당한 서늘함과 온기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화산이 폭발했던 곳이라 토양까지 비옥했다. 농사가 잘 되어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현지인으로부터 상공업 활동에 필요한 권리를 얻고 대신 그들의 문명과 문물을 현지인에게 전해주었다. 페르시아인에게 무엇보다 매력적인 진상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명마였다. 명마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페르시아 왕 비문 중에 '카트파투카(Katpatuka)'라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좋은 말을 생산해내는 도시'라는 뜻이다. '명마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그 일대는 언제부터인가 '카파도키아'라고 불리었다.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은 애니메이션 <스머프>의 배경이 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기암괴석으로 솟는 해를 바라보는 열기구 관광 상품이 만들어졌다. 열기구만으로도 성수기 하루 관광수입이 3억 원을 넘을 정도로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2)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과 데린쿠유 지하도시

카파도키아를 다녀오고 이스탄불로 돌아온 1주일 뒤 나는 13군데 박물관을 갈 수 있는 '뮤제 카르트'를 만들어서 박물관 투어에 나섰다. 아야 소피아 사원 인근에 있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부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박물관 실내에 들어섰을 때 이스탄불에서 730km 떨어진, 쉬지 않고 12시간이나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명마의 도시'가 떠올랐다. 스머프들이 살았던 깔때기를 엎어 놓은 듯한 수백만 개의 기암괴석들이 솟아 있는 계곡을 따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 그 위로 펼쳐질 벌룬의 향연을 창조주 마냥 거만스럽게 내려다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나를 붙들어 맨 것은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지하 도시인 데린쿠유(Derinkuyu)였다. 내가 박물관을 거대한 묘지로 인식했을 때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도시가 오버랩되었던 것이다.

지하 도시 데린쿠유는 터키 중부 네브셰히르 주 카파도키아 지역 일대에 산재해 있는 200여개의 지하 도시 중 한 곳이다. 2~3만 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지하 8층에 깊이는 85m이다. 현재는 지하 1층부터 4층의 교회까지 약 10% 정도가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다.

참고로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쿰바(Catacumba)와는 목적이 확연히 다르다. 카타쿰바는 종교 박해가 시작되자 기독교인들이 종교 활동을 위해서 지하 공동묘지로 숨어 들어간 곳이다. 카파도키아 지하도시는 오직 생존이 목적이었다. 땅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가 다른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는 무수한 침략과 약탈의 접전 지였다. 살기 위해서는 피난처가 필요했다. 어느 한 시기에 기독교를 가진 사람이 그곳에 살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갈수록 인구가 늘고 기술이 발달하여 더 깊고 복잡한 미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 바퀴 모양의 돌덩이를 통로마다 설치해 비상시 통로를 막았고 독특한 기호로 길을 표시해 외부에서 침입한 자는 길을 잃도록 여러 갈래의 통로를 뚫어 놓았다. 아주 거대한 규모로 형성된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하 대피소는 200개에 이르는 지하 도시로 서로 연결되었다. 한 곳이 정복되면 5~8km 이내에 있는 다른 곳으로 탈출이 가능했다. 비상시에 사람이 들어가면 두 달 동안 모든 생활이 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에 이르러서는 이 지하 도시가 쓸모없어졌다. 그들 자체가 정복자였기에 숨고 방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963년 농부가 잃어버린 닭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망각의 장소였다.

박물관 본관의 어두운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자 나는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난히 사람들이 모여 동영상을 촬영한 곳에서 나도 멈춰 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관이었다. 석관 전체에 알렉산드로스의 활약상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 중 이수스(Issus) 전투(기원전 333)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패퇴시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조 앞에 섰다. 18명의 사람과 6마리의 말이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는 장면이 석관 한 면에 펼쳐져 있었다. 석관 맨 왼쪽에 있는, 사자탈을 머리에 쓰고 말을 탄 사람이 알렉산드로스였다. 앞발을 힘껏 들어 올린 말의 등 위에서 창을 높이 치켜든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승리를 쟁취할 기세였다.

알렉산드로스도 기원전 334년에 단번에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카파도키아까지 오긴 했다. 하지만 그곳만은 정복하지 못했다. 지하도시 때문이었다.

지하도시를 언제 누가 제일 먼저 만들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인류 최초로 철기 무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 사람들일 거라고 입을 모은다.

3. 최초의 평화 조약 카데시 조약

히타이트(Hittite)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에 존재했지만(기원전 1600~기원전 1178년)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제국이다.

현재 터키의 보이즈칼레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였다. 하투샤는 고원지대로 철 성분이 많은 토양뿐만 아니라 철을 녹일 정도로 풀무 역할을 해줄 맹렬한 바람이 황야에서 불었다. 이들은 자연을 지혜롭게 이용해서 인류 최초로 철기 제련 기술을 발전시켰다.

철기 제련 기술은 아쉽게도 무기를 만들어냈고 신개발 무기로 무장한 히타이트 사람들은 그 당시 청동 무기를 사용했던 이집트와 기원전 1274년에 카데시에서 야심 차게 한판 붙는다. 고대사에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을 시작했던 셈이다. 한판으로 끝날 것 같은 전쟁은 히타이트 무와탈리 2세와 이집트 람세스 2세 때 시작해서 무려 16년이나 이어진다. 지칠 대로 지친 두 제국은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가 즉위하는 것을 계기로 전쟁을 멈추고 평화조약을 맺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명 '카데시 조약(Kadesh Treaty)'이다. 위 카데시 조약문의 진본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사본이 유엔 본부 1층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집트어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문이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벽에 새겨져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문은 고대 동방 박물관의 출입구 오른쪽에 초라하고 작은 건물에 보관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쳐버렸다. 본관에서 나와 지하 무덤에서 묻혀온 눅눅한 공기를 말리듯 야외에서 햇볕을 실컷 쬐었을 때에야 눈에 들어왔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히타이트 문명권의 유물과 유적까지 전시되어 있어서 손바닥만 한 크기인 '쐐기 문자'는 잘 살피지 않았다면, 해독할 수 없는 고대문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고도 남았을 거였다. 하지만 쐐기문자는 도도하게 나를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내가 고고학자가 된 것처럼 쐐기문자를 해독하려는 듯 오랫동안 서 있었으니까. 내용은 이러했다.

"이집트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하투실리 3세의 영원한 평화를 약속한다. 두 나라는 평화가 맺어준 형제이며 서로의 땅을 한 치도 넘보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외적에 시달려 병력 요청을 할 경우 만족할 만한 병력 지원을 약속하겠다. 전쟁 중에 도망 간 포로들은 조건 없이 자국으로 소환할 것이며 그들 가족 또한 본국으로 돌아가서 눈물 흘릴 일 없게 만들 것을 약속한다."

즐길 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카파도키아에서 보냈던 이틀이라는 시간보다 인류 최초의 성문 평화조약문 앞에서 나는 가슴이 떨려왔다. 세계 역사는 무수한 전쟁의 역사였다. 정복자는 전리품을 거둬들이기에 급급했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면서 피의 명예를 돈으로 덧발랐다. 먼 과거와 장소를 소급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도 '자신의 이해관계'로 기꺼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투쟁(?)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넘쳐나니까 말이다.

'~그들 가족 또한 본국으로 돌아가서 눈물 흘릴 일 없게 만들 것을 약속한다.'라는 문구처럼 적들까지 배려하는 저 머나먼 시공간의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시간에, 나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해서라고 하면서도 눈물 흘릴 일이 많은 요즈음 몸을 숨길만 한 데린쿠유 같은 피난처가 없을까라고 중얼거려 본다.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35-2. 아카드어로 만들어진 점토판. 아크릴판에 달려 있는 것이 실제 조약문이다. 사진 윗부분은 글자를 크게 볼 수 있도록 만든 모조품이다.

35-3.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을 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알렉산더의 석관'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의 유해를 모신 석관이 아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에 의해 시돈의 사트랍(satrap, 封侯)이 된 아브달로니모스를 위해 만든 관으로 밝혀졌다.

35-4. 이스탄불 박물관에 전시된 석관들.

35-5. 데린쿠유 지하도시.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