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마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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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마을이란 무엇인가
  • 입력 : 2020. 09.03(목) 18:23
  • 편집에디터

순천 낙안읍성마을. 뉴시스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 테레사 수녀가 선종하면서 남긴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성인의 경지에 오른 그녀 아닌가. 약속받은 천국이 있으니 87년간의 이승일지라도 고작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글쎄다. 그녀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이름도 빛도 없던 빈민과 노인과 아이들에 비추어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속절없는 시간과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다고나 할까. 극락을 예비한 자도 천국을 약속받은 자도 예외 없는 것이 실존적 고독과 외로움 아닐까. 가까운 예로 오랫동안 OECD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살률을 들 수 있다. 인구 10만 명당 26.6명(2018년 기준)에 이른다. 2020년 6월 1일 보건복지부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발표한 자살예방백서 자료다. 2017년보다 9.7%증가했다. 자살률이 가장 높았던 2011년보다 16.1% 감소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경제적 어려움, 신체적 어려움 등 갖가지 원인들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외로움이다. 어느 시대라고 외로움이 없었겠는가만 특히 현대인들은 심각해 보인다. 외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다각적으로 분석된다. 다 열거하기 어렵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외로움 그 후'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자기 삶의 어떤 잔혹한 분기점에 도착했을 때, 도저히 이 지상에서 숨쉬기 힘들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고통을 토로하고 나눌 벗이 필수다. 그럴 벗조차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내 경우는 그럴 때마다 고향마을을 찾는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 곁에서 목 놓아 울다가 다시 일어섰던 기억들이 처연하다. 죽을 것 같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곳,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라서 그럴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고향마을은 대개 그런 곳이다. 반론이 돌아온다. 전통적인 마을에 대한 감수성 없는 아파트촌 출생자들은 어찌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병원이나 아파트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본원적 노스탤지어조차 망실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길지가 아니라, 도심의 한 공간도 마을이기 때문이다. 전자를 과거형태의 향수라 한다면 후자는 미래형태의 향수다. 그 전형적인 지상의 공간이 마을이다.

마을의 본뜻, 유향(流鄕)에서 회향(回鄕)까지

'마을'은 'ᄆᆞᆯ'과 'ᅀᆞᆯ'의 합성어다. 'ᄆᆞᆯ'은 모으다, 모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을'을 '말'이라고 부르는 곳은 강원, 경상, 충남, 평안, 함경, 황해, 중국 동북삼성 등 광범위하다. 모였으니 '떼거리'다. 예컨대 여러지역에 분포한 '말무덤' 유적들은 '말(馬)'의 무덤이 아니라 어떤 떼거리의 무덤을 말한다. 유사한 말이 '무리(group)'다. 달무리, 해무리 등의 용례가 남아있다. 영어권의 Village, 중국의 촌(村)이나 툰(屯)이다. 일본의 무라(むら/村)가 흥미롭다. 우리말 '말(마을)'의 고어가 '모라'이기 때문이다. 단국대 남풍현교수에 의하면 탐라의 옛 이름은 탐모라(耽牟羅)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에도 거벌모라(居伐牟羅)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포나모라(布那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등을 열거하고 있다. 모두 마을이란 뜻이다. 'ᅀᆞᆯ'은 '슬'이나 '실'의 고어다. '마실간다' 할 때의 '마실'이 용례로 남아 있다. 곡성 돌실나이의 '돌실'이나 전국에 분포하는 '밤실', '닭실' '비실' 등도 그러하다. 모두 계곡(谷)을 낀 들판, 곧 넓은 '골짜기(고을)' 형국이다.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품은 형세)의 공간에 어떤 주체들이 모인 형국을 '마을'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ᅀᆞᆯ'은 특정한 공간이요 'ᄆᆞᆯ'은 유동하는 주체들이다. 문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해온 마을의 실체를 주목하는 일이다. 유기적인 네트워크의 확장이나 생산소비구조의 전복, 절대인구의 감소와 관계인구로의 전환 등이 대표적이다. 고정된 공간과 유동하는 주체들간의 네트워크를 주목해야 마을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마을의 이미저리 속에 함정이 있다. 대동계니 상포계니 품앗이니 따위의 공동체 안에 은닉된 이데올로기들이다. 대동의 마인드와 지주 소작 관계, 남존여비 따위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근자에 유행하는 도시재생이니 마을만들기니 어촌뉴딜이니 하는 따위의 새로운 디자인들속에서 산견되는 오류들이다. 수축사회의 수렴을 담아내지 못하고 호혜평등의 민주를 담아내지 못한 채 끊임없는 증식과 재화의 확장만을 꾀하고 있다. 비전 없는 달리기, 브레이크 없는 무한욕망에 대한 질주를 멈주치 않으면 군중 속의 외로움들은 늘어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보다 본래적인 마을의 기능을 되찾는 일이 시급해보인다. 아이들을 위한 공동육아의 전통, 삶 자체로서의 마을학교, 요양원에 끌려가지 않고 내 마을에서 임종할 권리, 관계인구의 회복 등이 해답을 줄수 있다. 진도 가사도에서는 초상이 나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갑계원 동창계원들이 모두 와서 상례를 치룬다. 마을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마을 구성원임을 알 수 있다. 해남군 농촌신활력플러스 추진단을 이끌고 있는 박상일 대표에 의하면, 이러한 관계인구와 마을 커뮤니티케어, 가치농어업 등으로의 전환이 마을 회복운동의 필수 요건들이다. 나도 마을의 정체와 비전에 대해 배워가며 이 실험을 주목하고 있다. 거향(居鄕)에서 유향(留鄕)으로, 노마드시대 유향(流鄕)민들이 막다른 벼랑에 몰렸을 때 비로소 회향(回鄕)할 수 있는 노스탤지어의 재구성, 내가 구상하는 마을은 대체로 이런 디자인이다. 나는 끊임없이 꿈을꾼다. 적어도 현대인들에게 이 땅 어딘가 마음의 고향마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도인문학팁

잃어버린 본향(本鄕) 레퓨지움(Refugium)

레퓨지아(refugia)는 빙하기와 같은 대륙 전체의 기후 변화기에, 다른 곳에서는 멸종된 것이 살아 있는 지역을 말한다. 영국 본머스대 연구팀에 의하면,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날 때 빙하기가 닥쳐 다양한 고대 인류들이 '레퓨지아'라는 곳으로 모였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 때문에 인류가 지구별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 과학적 분석은 빙하기 때문에 인류가 지구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유기체가 소규모 제한된 집단으로 생존하는 지역 또는 거주지라는 말이다. 레퓨지움(refugium)은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레퓨지아의 복수형이다. 이들 지역에서 생존을 지속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기후적, 지형적, 생태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특성들이다. 레퓨지(refuge)는 피신처, 은신처, 난민들의 도피시설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바꾸어 말하면 레퓨지아가 아니면 인류는 멸종되었다는 뜻이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레퓨지아이고, 내가 회향(回鄕)이라 명명하고 복원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전통마을 운동이 겨냥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여우도 죽을 때 머리를 향한다는 동굴의 의미가 곧 본향(本鄕)으로서의 마을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전반에 분포되어 있는 홍수설화의 발원지다. 홍수로 세상 모든 것들이 물에 휩쓸려 죽고 마지막 남은 음양의 남녀가 새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설화의 표본이다. 내가 말하는 본향(本鄕)은 나의 시조가 태어난 본토의 의미를 넘어서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것을 레퓨지움 본향이라 명명해본다. 세파에 시달리고 죽을 것만 같은 역경들을 무수히도 견뎌내며 살아왔던 우리들이 잃어버린 곳, 피난처처럼, 어머니의 품처럼, 인류 시원의 동굴처럼 영육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본향 마을이다. 이 마을이 살아야 사람이 살고 나라가 살며 지구별이 산다. 나는 오늘도 마을로 간다.

장성 금곡영화마을. 뉴시스

한국의 몽마르뜨로 불리는 목포 서산동 보리마당 전경-목포시민신문

해남 흑석산 비슬안 당산리 마을입석-이윤선촬영

부산 감천문화마을.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