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박용수>'가지 못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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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에세이·박용수>'가지 못한 길'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 입력 : 2020. 09.28(월) 10:59
  • 편집에디터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오랜만에 낚시를 하러 갔다. 남도는 굽이굽이 골짜기마다 황금연못을 품고 있다. 두어 시간을 달려 도착한 바닷가 은밀한 낚시터. 내가 터를 닦아놓은 곳에 누군가 찌를 세우고 있다. 그의 뒷모습이 평온하다. 한참을 망설인 후, 나는 몇 마장 옆에 자리를 잡는다. 갈대들이 서로를 가려주었을 뿐이지만 그와 나는 같은 호수 수면에 시선을 박고 있다.

찌 한번 움직이지 않고 한나절이 자나갔다. 낚시를 기다림의 미학이라지만 내심 심기가 불편하다. 어디 찌만 바라보러 왔던가. 이쯤 묵직한 손맛이 아쉬워 그가 있는 곳으로 자꾸 시선이 간다. 내가 주변 정리를 잘 해두었고, 또 나름 호수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다. 물론 물골이 깊어서 입질 횟수도 남다른 명당 포인트이다.

해가 설핏 기울 즈음까지 찌는 꼼짝도 않는다. 이건 나보다 움직이라는 뜻이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그자는 여전히 수면을 응시하고 있다. 좋은 자리라 튼실한 붕어 몇 수는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리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겠는가. 호수 반대편은 맞바람이 불고 수심도 낮다. 밤낚시를 할 요량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온다. 그런데 이런 웬 횡재, 명당 포인트가 비었다. 그자가 어느 사이 짐을 챙겨 떠난 것이다. 아마 엄청 많이 낚아서 더 이상 낚시가 의미가 없어서 떠났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잡는다. 참 예쁜 자리다. 그자도 나처럼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갔다. 아쉬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풍성해지고 넉넉해졌다. 두어 시간이 설렘으로 훌쩍 지나갔다. 그런데, 살살 조급증이 일었다. 오늘은 물고기들이 시위하는 모양이다. 찌는 요동도 않고 막대이다.

기지개를 펼 겸 몇 걸음 나와 처음 내가 했던 곳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런 그 사내다. 조금 전에 내가 했던 곳에 그가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 절묘한 시간에 그와 내가 위치를 맞바꾼 것이다. 그 사내는 오전에 했던 내 생각들을 하고, 나는 그 사내가 그때 했던 생각들을 지금 하고 있는지 모른다. 녀석도 이쯤 되면 한번쯤 내 뒤통수를 보았을 것이고 그 또한 헛웃음을 쳤을 것이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못한 길'은 많은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이다. 황혼에 이른 사람들 중에 '가지 못한 길'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는 노인은 특히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낚시터에서의 과거의 일들을 검색해보고 내일 일어날 일들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지금 상념들을 건져 올리며 사색에 빠져있는 것이다. 지난 삶들을 낚다보면 낚지 못한 꿈들이 수면 바닥 같은 보이지 않는 곳곳을 유영하고 있다. 넓은 호수가 세상이라면 우린 그 작고 좁은 한곳에서 삶을 펼치고 있는 낚시인일 것이다. 그러니 수면 위를 박차고 오르는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 같은 싱싱함을 꿈꾸는 조사들에게 건너편이나 상대방 포인트는 늘 '가지 못한 길'일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본 길보다 '가지 못한 길'이 더 넓고 많을 것이다.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설레는 길이지만 또 누군가는 소중한 이와 헤어져 눈물 흘리며 걷는 길일 것이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힘차게 뛰거나 페달을 밟지만 그 누군가는 수심 가득 비틀거리며 겨우 걷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낚시를 할 때, 누구는 여행을 하거나 골프를 치고 책을 읽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 울고 있을 벽 너머로 누군가는 생일잔치를 하고, 누군가 아쉬움을 간직하고 퇴사하는 씁쓸한 길에 그 누군가는 입사 원서를 들고 뛰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소망하는 길을 그 누군가 열심히 가고 있을 것이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 역시 그 누군가 간절히 꿈꾸는 가지 못한 길일 것이다.

수만 갈래의 갈림길들. 그 중에 나는 지금 한 갈래 길을 가고 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집착보다 '가고 있는 길'을 통찰하고 거기에 파닥파닥 심장처럼 뛰는 생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혜안, '가지 못한 길'이 들려주는 지혜일 것이다.

지금 피안의 그 친구도 찌에 시선을 두고 미동도 않는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