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영윤>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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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기고·기영윤>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기영윤 농협구례교육원 교수
  • 입력 : 2020. 09.24(목) 13:51
  • 편집에디터
기영윤 농협구례교육원 교수
순식간이었다. 살찐 소와 어린 송아지가 큰 눈을 껌벅이며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어느 순간, 아무런 조짐도 없이 다짜고짜 물이 밀고 들어왔다. 비닐하우스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에 밤새 잎을 뒤척이던 푸른 오이와 호박들도 파도처럼 달려드는 누런 흙탕물을 피할 수 없었다. 빗줄기 사이를 헤집으며 목이 터져라 울리는 경고방송마저 높이를 모를 물에 휩쓸렸다. 가재도구는커녕 제 한 몸 빠져나온 것이 기적이었다. 시리게 푸르던 섬진강이 댐이 쏟아내는 물을 받아 내다 받아 내다 지쳐 탁 팔을 풀어버리던 순간, 모든 것이 휩쓸려버렸다. 그렇게 구례는 허망하게 잠겨버렸다.

수재가 난지 50일이 되었다. 유례없는 침수피해에 군인을 비롯한 각지의 자원봉사자들이 구례를 찾아 이재민과 함께 폭염 아래에서 땀을 흘렸다. 함께 근무하는 직장동료들과 세 곳의 피해복구현장을 찾아 서툰 손을 보탰다. 그런 십시일반의 힘이 모아져 오일장은 임시 재개장을 하고, 읍내는 서서히 예전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멀리 있는 지인들, 읍내의 도로를 스치듯 지나는 관광객들은 이제 복구는 다 끝났으려니 생각한다. 그럴 만도 하다. 사람의 시간 감각이란 어떤 경우에는 물살보다 빠르지 않던가.

그러나 현실은 감각이 아니다. 축사와 비닐하우스는 아직 철거조차 제대로 안 된 곳이 많고,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고단한 등허리를 눕힐 방 한 칸을 놓기까지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광복절을 기점으로 급증하던 코로나 확진자 수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을 묶었고 연달아 찾아온 태풍은 수해의 이슈마저 멀리 쓸어가 버렸다. 이제는 고통의 시간을 밀어내고 느릿느릿 흐르고 있는 섬진강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의 구례는 여전히 도움의 손길이 절박하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는 강이라고 노래했다. 생명은 그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 서로 기대며 이어진다. 누군가 어려울 때 기쁘게 내 손을 내주고,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시인은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일갈했다. 시인은 섬진강을 따라가며 서로에게 품을 내어주며 살아온 민중의 건강함을 보았으리라. 나는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호혜의 마음이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리라.

섬진강의 지혜가 지금 필요하다. 이재민의 '그을린 이마 훤하게'해 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