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이슈 4-3> '예향의 본류' 고려때부터 축적된 문화적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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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4-3> '예향의 본류' 고려때부터 축적된 문화적 자산
고려시대 선비·한량들 놀이터 ||일제시대 관공서 들어서며 ||문화공간으로 전성기 맞아 ||일제강점기 ‘연진회’ 역할로 ||예술의거리만의 정체성 구축
  • 입력 : 2020. 09.20(일) 18:37
  • 박상지 기자
예술의 거리는 1987년 7월 8일 광주시 조례 제1643호로 지정됐다. 지난 2010년 예술의 거리가 특화거리로 지정된 이후 10년째 예술의 거리는 열십(十)자 형태를 유지해오고 있다. 김양배 기자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시대가 본격화 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생존전략으로 '문화'를 채택해 왔다. '거리'조성사업은 이 시기, 각 도시의 문화적 가치를 표현하고 공유하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광주 예술의 거리는 '예향'으로 알려진 광주의 대표 문화명소로 1987년 지정됐지만, 예향의 본류로서 예술의거리의 정체성은 고려시대때부터 축적 돼 왔다.

●고려시대 선비들의 놀이터

한국지역지리학회지 제21권 제3호 '생활주체의 경험을 통해 본 광주 예술의 거리 장소성 연구'에 따르면 예술의 거리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것은 고려시대때부터였다. 예술의 거리의 행정학적 지명은 '궁동'이다. '활 궁(弓)'이 사용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고려시대 이 지역은 활터였다. 활터 주변에는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선비와 한량들이 모여들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한량들의 풍류장단에 호응하기 위해 필방과 화랑들이 자연스레 들어섰다. 예술의거리가 1970~80년대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인근에 들어서있었던 관공서 덕분이었는데, 조선시대 이 장소가 광주의 중심지였던 광주읍성 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시대에 광주읍성이 허물어지고, 예술의 거리 부근에서 주거를 하던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후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도심부에 필요한 행정·금융·사법 공간들이 들어섬에 따라 궁동은 관가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변해갔다.

●관공서, 예술의거리의 원동력

예술의 거리 인근에 들어선 관공서는 예술의 거리 상권과 주변 공간과의 성장에 영향이 컸다.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진급용이나 선물용으로 인사치레 그림을 선물하는 관행이 있었고, 이는 거리 상점들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당시 예술의 거리는 화랑이 아닌 다방과 여관이 많았다. 관공서에 일을 보러오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술가들이 여관에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표구를 하는 등 전시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모여들던 표구사들이 화랑이나 미술관으로 분업화됐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아파트 열풍과 경제적 상황 호전, 정부의 강력한 문화예능 대책과 맞물리면서 그림의 인기가 올라가게 된 계기가 되면서 예술의 거리도 빠르게 성장해갔다. 1979년 오일쇼크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잠시 거리는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동부경찰서 청사 개축과 남도문화예술회관의 개관으로 문화예술인들을 모았고, 상점도 많아지게 됐다. 단순한 미술도구에서부터 표구와 판매까지 한 거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1987년 예술의 거리 지정의 주춧돌을 형성해갔다. 인근에 들어섰던 사직공원과 남도예술회관은 예술의거리를 상권만이 아닌 문화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예술의거리의 원류는 '동양화'

일제강점기부터 호남지역은 미술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봉건적 지주문화와 항일·민족정신, 근대적 예술정신은 광주예술의 근간을 만들었다. 특히 예술의거리와 남도미술계의 형성에는 '동양화'가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의재 허백련을 중심으로 한 '연진회'가 있었다. 당시 광주 미술계는 의재 허백련을 중심으로 한 남화풍 화단과 항일지사들의 서화, 오지호 등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신진 작가들의 등장 등 세가지 양상이 전개됐었다. 이 중 크게 세력을 떨쳤던 계열은 연진회였고 이들이 남동 계열로 이어지면서 남종화의 대표 주자가 됐다.

'생활주체의 경험을 통해 본 광주 예술의 거리 장소성 연구'저자 김연경씨는 "광주가 예향의 도시로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연진회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며 "일본 유학파 출신 등 광주 서양화 화단 1세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전까지 서양화보다 동양화가 더 대중적이었고 예술의거리 형성에도 기여했다"고 밝혔다.

●표구사·다방, 화랑의 전신

화랑과 필방, 전통찻집 등 예술의 거리를 이루고 있는 상점들이 이곳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표구점의 역할이 컸다. 예술의거리에 표구점이 들어섰던 것은 1950년대 '춘산당'이었으며 이후 거리의 역사를 체험하며 그림전시, 판매 등의 역할을 하며 화랑으로 변천해갔다. 1960년대 여고생들 사이에서 수예표구가 유행하면서 예술의 거리 내 수예가게와 표구점들이 성행했으며 자연스레 화방과 필방, 미술방, 전통찻집, 식당들이 모여들었다. 이외에도 이곳에는 관공서 관료와 작가들을 상대로 하는 여관이나 다방이 성행했었는데, 다방에서는 표구사와 마찬가지로 전시회가 열리곤 했었다. 1982년 동부경찰서가 개축되고 남도예술회관이 인근에 개관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이 더 많이 드나들게 됐고 상점도 많아졌다.

김연경씨는 "단순한 미술도구에서부터 표구와 판매까지 모두 한거리에서 해결할 수 이는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1987년 예술의거리 지정의 주춧돌을 형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