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하정호>우리에게는 큰 아빠, 큰 엄마가 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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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창·하정호>우리에게는 큰 아빠, 큰 엄마가 있어야 해
하정호 광산구청 교육협력관
  • 입력 : 2020. 09.27(일) 14:54
  • 편집에디터
하정호 광산구청 교육협력관
"너 여기에서 자꾸 떼쓰면 엄마 아빠는 너 여기 두고 그냥 간다." 장난감가게나 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십수 년 전의 일이지만 나 역시 첫째 아이를 키울 때 그런 적이 있는 것 같다. 몇 번을 얘기해도 자석에 들러붙은 것처럼 아이가 꿈쩍도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울 때 부모가 쓸 수 있는 수단이 마땅찮다.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먼저 걸어갔더니 아이는 이내 포기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그 자리에서 자지러져 울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그것은 아동학대였다. 부모와 멀리 떨어뜨려 아이를 고립시키고 방임하는 경우는 아동학대에 속한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비난하거나 무시하고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것도 아동학대다. 이 정도의 훈육은 허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내 아이가 학교에서 폭언이나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고 학교에 신고하는 부모가 많을 것이다. 해마다 따돌림을 당하고 외로움을 겪다 자살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가하는 정서적 폭력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공동체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고립이 죽음에 버금가는 무서운 형벌이다. "나가 죽으라"는 말이 심한 욕설인 것도 그 때문이다. "내놓은 자식"이란 말도 마찬가지.

지난 5월 29일 경남 창녕에서 한 아이가 지붕을 타고 이웃집 베란다로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그 아이의 손가락을 프라이팬으로 지지며 계부가 했다는 말이 "다시 가족이 될 기회를 주겠다"였다. 그 아이는 집안 베란다에 갇혀 허드렛일을 하며 쇠사슬로 묶여 지내고 있었다.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학대에서 탈출한 9살 소녀는 한때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위탁가정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아이는 그 분들을 "큰 아빠, 큰 엄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위탁가정으로 가더라도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냐고도 물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친구들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가족, 이웃, 친구와 같은 공동체가 절실하다. 심지어 아이를 학대했던 그 부모들조차, 함께 키웠던 다른 자녀 3명까지도 위탁기관에 맡겨진다는 얘기를 듣고서 신체 일부를 자해하고 투신하려는 소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창녕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이들 가족은 거제에서 살았다. 조선업에 종사하던 아빠는 실직을 당했고 엄마는 3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학대피해자인 큰딸과 5살, 4살, 1살 네 딸이 있는 아이의 엄마는 막내를 임신한 지난해부터 약을 먹지 않았다. 작년 10월에는 담낭 제거 수술까지 받아 임신 중에도 많이 힘들었다. 지난 2월 말 막내를 출산하고서는 산후우울증에까지 시달렸다. 비정규 일용직인 남편은 일감을 찾아 자주 출장을 다녀야 했다. 코로나19에 걸릴까봐 올해 1월 창녕으로 이사했다. 엄마가 집에서 24시간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그때부터 첫째 딸에게 학대가 심해졌다.

검찰은 지난 18일, 구속된 아빠와 엄마에게 각각 징역 10년과 징역 8년을 구형했다. 9살 소녀는 과거 2년간 자신을 돌봤던 위탁부모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그 엄마와 아빠를 돌보아줄 곳은 어디에 있나? 수감은 처벌일 뿐 치유일 수 없다. 그 부모가 아이를 버리기 전, 우리가 먼저 그 가족을 공동체 밖으로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 아빠가 거제에서 직장을 잃지 않고 엄마가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해도 그런 끔찍한 학대가 일어났을까? 그 부모에게도 "큰 아빠, 큰 엄마"가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아동학대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부모에게도 우리와 "다시 가족이 될 기회"가 있어야 한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 죽지 말고 삽시다"라는 글을 올렸다. 13살부터 위장취업한 공장에서 두들겨 맞으며 일한 그는 청각장애가 있다. 프레스에 팔이 끼어 불구가 되어도 따지지 못했다. 가난의 늪은 끝 모르게 깊었고 살아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소년공은 다락방에서 연탄불을 피웠다. 동네 약국에서 수면제도 한 움큼 사 먹었다. 그를 살린 건 동네 약사였다. 수면제 대신 소화제를 왕창 주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자주 서럽고 억울하고 앞날이 캄캄해 절망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게 하는 건 서로를 향한 사소한 관심과 연대 아닐까요. 제가 40년 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말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