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임한필> '쌍무기수' '빗자루도사' 의 죽음과 광주정신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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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임한필> '쌍무기수' '빗자루도사' 의 죽음과 광주정신의 부활
임한필 (사)24반무예경당협회 前사무총장
  • 입력 : 2020. 09.28(월) 10:58
  • 편집에디터
임한필 (사)24반무예경당협회 前사무총장
1979년 남민전과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군부독재정권에서 무기징역형을 두 번이나 받아 '쌍무기수'로 9년 9개월을 복역한 임동규 선생님께서 8년이 넘는 투병생활 끝에 지난 9월 21일에 향년 81세로 타계하셨다. 임 선생님은 1939년에 광주 광산구 지산동 평택임씨 집성촌인 탑동마을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나중에 민가협 활동을 열심히 하신 임 선생님 어머니는 셋째를 유달리 예뻐하셨다. "장차 대통령이 될 아이"라고 주변에 자랑을 많이 하셨다. 임 선생님 집안은 당시 정미소를 할 정도 나름 여유가 있었으며, 서울대를 6명이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기로 유명했다.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나와서 1년을 제수하고 서울대 상대를 들어갔다. 거기서 임 선생님은 '소년 빨치산' 출신인 박현채 선생님을 만난다. 해방 전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일에 천착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글을 박현채 선생님과 함께 쓰게 된다. 또한 이우재 선생님, 홍갑표 선생님 등과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구농회, 서울대 향토개척단, 농업근대화연구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60~70년대에 민족해방전선에서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던 임 선생님은 1.5평의 감옥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물론 언제 밖으로 나가서 행동에 옮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993년에 경당사범이자 제자였던 필자에게 이렇게 증언하셨다. "쌍무기수였기에 내가 언제 밖으로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나가게 된다면, 우리의 전통무예인 '24반무예'를 감옥에서 완전히 복원해서 민족무예를 통해서 새로운 변혁운동을 하겠다"고 맘을 먹고 "매일 무예도보통지 책과 빗자루를 놓지 않았다"고 하셨다. 하도 열심히 하니, 교도소 소장이 목검과 봉을 사다 주었다고 한다. 민주화 열풍으로 1988년 12월에 석방이 되고, 1989년 7월에 민족무예도장 경당을 설립해서 감옥에서 복원한 24반무예를 당시 전국 150개 대학 중 100개가 넘는 대학에 경당동아리를 조직해서 무예를 가르쳤으며, 250명의 사범을 양성하고 10만명이 넘는 대학생, 청년, 노동자, 시민에게 민족무예의 혼을 심어주었다. 임 선생님은 여전히 뭔가 맘을 먹으면 반드시 하는 불굴의 신념과 의지를 가진 투사였다.

민족의 혼이 별이 되었다. 임 선생님은 이젠 자신을 소중히 아꼈던 박현채 선생님, 박석률 선생님 등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저 세상에서 술 한 잔을 나누시며 망중한을 즐기고 계실 것이다. 2012년에 암수술과 함께 치매, 파킨스병으로 요양병원에서 8년이 넘게 투병생활을 하셨다. 지역에서 사회활동을 전혀 못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지역의 시민사회단체는 임 선생님의 치열하고도 고난했던 삶을 잊지 않았다. 70여개 단체가 장례위원회에 참가하고 600명이 넘는 민주화운동 동지 및 원로, 시민분들께서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여 '민족통일운동가 24반무예명인 故 임동규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치뤘다. 그리고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안장될 수 있도록 추모연대, 범민련, 6.15남측위 등에서 애쓰셨다. 원래 가까이에 것은 평소에 그 소중함을 잘 알지 못한다. 5.18이후 광주정신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민주, 인권,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는 항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정치권의 소유물로만 알고 있었다. 5.18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이 만들어낸 '대동세상'이라는 공동체문화를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허나 이번에 '나의 스승'인 임동규 선생님을 광주 지역사회와 시민단체에서 지난 3일간 아낌없이 모시고 보내주셨다. 광주정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2019년 6월에 임 선생님은 1981년에 소위 '간첩단' 사건으로 쌍무기수를 선고받은 이후 38년 만에 재심청구를 한 후 5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빨갱이'라는 멍에를 벗으셨다. 어떻게 보면 분단시대에 '빨갱이'라는 호칭은 민족과 민주를 위해 온몸을 바치신 분들께 주는 '훈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군부독재와 싸우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신 모든 분들이 겪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가족의 불행이다. 1979년에 임 선생님의 가족은 온갖 고문과 폭행 그리고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집성촌이었던 조요한 시골동네와 평범하였던 가정은 풍지파탄이 되었다. 동생은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신 큰 형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회유와 협박으로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이라고 증언하신 분들은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살밖에 안된 딸아이는 죄수복을 입은 아버지를 십년간 보아왔다. 이 모든 고통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한 인간의 신념을 바탕으로 한 선택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폭력이 행해지고 인간과의 사이에서 불신과 오해로 자신의 영혼을 짓눌리게 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것이 이젠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민족의 전사였던 임동규 선생님! 부디 영면하소서. 그리고 감사합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