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진도 판소리와 신청(神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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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진도 판소리와 신청(神廳)
  • 입력 : 2020. 10.07(수) 11:11
  • 편집에디터

즐거운 만가 축제와 진도북놀이, 2013. 이윤선 촬영

남도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남도풍속의 지형은 넓고도 깊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풀어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삼국시대의 향가로부터 오늘날의 가요까지, 영산강이며 섬진강에서 한라 백두까지 남도에서 발원하고 재구성된 문화들이 켜켜이 쌓이고 확산되었다. 이 스펙트럼을 가늠하기란 어린 날 운조리(망둥어) 잡으러 개옹에 나갔다가 잊어버린 검정고무신짝 찾는 일보다 어렵다. 전문적인 연구자라도 그럴진대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다. 어딘가 혹은 무엇인가 샘플이 필요하다. 다행이 우리는 다양한 장르가 국가의 강제나 지방정부의 요청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고 더러는 잔존 유산으로 남아있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도다. 전국 유일이라고 말하면 다른 지역에서 오해하겠지만 인구 삼만 안팎의 작은 섬에 강강술래,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들노래, 남도민요 등 십 수 개가 넘는 무형유산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탄탄하게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중의 다섯 가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내가 줄곧 주장해왔던 상가의 윷놀이나 유네스코 지정 매잡이 풍속 등은 거의 세간에 알려져 있지도 않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전통적인 통과의례, 씨줄날줄로 엮는 의례와 놀이, 들과 산과 바다에서 행하는 생업의 풍경들이며 그림과 글씨, 몸짓과 소리 예술들이 마치 한편의 소설을 축약해놓은 듯, 거대 보고서를 압축해놓은 듯 구성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시, 서, 화, 창의 각 장르들을 이처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을 갖고 있다는 점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즐겨 말해왔다. 남도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진도지역 판소리 소사(小史), 이병기와 신치선에서 신영희까지

진도문화 중에서 그 위상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판소리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를 이어받은 인간문화재가 진도사람 신영희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 그 일단을 소개해두기로 한다. 판소리에 전념한 예인들로 박동준, 신치선, 이병기, 양상식, 허회, 최귀선 등을 들 수 있고, 고수로는 김득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진도지역 판소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신영희의 부친 신치선과 이태백의 부친 이병기(본명 이병규)를 거론해야만 하다. 신치선은 1899년 전남 담양에서 신창연(申昌連)과 나주임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을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성장했다.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송만갑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1920년대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했다. 나이 40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여 신영희를 낳았다. 1946년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하여 진도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1948년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이때 제자들이 안득윤, 박연수, 박옥수, 신홍기, 신천행, 회동리의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했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옮겨 안향년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순회공연 및 만주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의 악화로 타계했다. 이병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사람이다. 해방 직후 정의현이 설립한 진도 최초의 국악원에서 판소리 강사생활을 했다. 진도 전역을 돌며 판소리 강습 및 창극지도 및 활동을 했다. 특히 지산면 지역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판소리 강습생이었던 이임례와 혼인하여 지금의 아쟁 명인 이태백을 낳았다. 이 스토리를 토대로 만든 것이 영화 '휘모리(1994년작)'다. 최근 국가지정 판소리 문화재로 지정된 이난초, 해남씻김굿 명인 이수자, 우수영 부녀요 보유자 이인자, 광주시 지정 판소리 문화재 이임례 등이 모두 형제 조카 사이다. 이병기 작곡이라고 전해지는 해물유희요 <빈지래기타령>을 포함하여 <숙영낭자전> <봄이 오면> 등이 전해진다. 진도사람 신영희는 김소희 수제자로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된 국창이다. 1942년 2월 6일 지산면 인지리에서 신치선의 딸로 태어났다. 인지리에서 성장하다가 의신면 초사리로 이사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어려서 부친 신치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후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 정순임의 모친 장월중선, 이난초의 스승 강도근 등 수많은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1975년에 서울에 올라가서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소희 문하에서 수업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있다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흔히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를 판소리 삼걸이라고 했다. 1976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1979년 연극'다시라기'로 배우 데뷔를 했다. KBS코미디 쇼비디오자키-쓰리랑부부(도창역)로 장기간 출연하여 판소리의 확장에 힘을 쓰기도 했다.

남도인문학팁

진도문화예술특구 <진도신청>은 언제쯤 복원 재구성될까

한승석, 주호종, 조유아 등 지금 한국을 휘두르고 있는 소장 소리꾼들 중 진도출신들이 50여명 된다. 여기에 트로트의 여왕으로 등극한 송가인까지 있으니 가히 소리의 고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진도는 육자배기나 흥타령, 진도아리랑 등 민요 전승이 활발하다. 대금․아쟁과 같은 기악전승 활동도 활발하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판소리가 진도 내의 독자적인 유파를 구성할 만큼 활발하게 전승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판소리를 배우고 익히는 자생적인 활동들이 활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신치선, 이병기, 김득수 등이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면서 마을별로 아마추어 소리꾼들을 많이 양성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이 진도의 구비문학 및 국악 전승의 기반이 되었다. 국립국악원이 진도에 생기고, 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된 이유이도 하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데가 진도신청이다. 판소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민속문화를 한군데 갈무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문화의 정체를 확인하려면 남도로 와야 하고 남도 민속문화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로 가야하는데 그 중의 핵심이 신청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지금 진도에 신청 혹은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까지 신청이 남아 있었고 그 기능을 하던 곳이 진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면상 자세한 얘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지난 칼럼에서 나주신청 복원을 거론하며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전국적으로 보면 나주신청 복원에 이어 경기도가 <재인청>을 복원한다고 한다. 남도지역에서는 화순 능주, 장흥지역에서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현재의 국립남도국악원이나 진도군립예술단의 수준하고는 결이 많이 다른 공간이다. 신청의 단순 복원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열린 공간으로의 신청을 말하는 것이다. 교육과 체험과 체류와 힐링 등 본원적 노스탤지어로서의 안식이 발현되고 확장되는 그런 공간 말이다. 코로나 19이후 진도에 가면, 친정 딸 맞이하듯 명절에 막내아들 맞이하듯 맨발로 달려 나오시는 어머니와 남도지역 태내의 소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 춘향가, 신영희, 예당음향표지

야외 여흥을 즐기는 진도사람들, 1972. 이토 아비또 촬영

영화 휘모리에서 이병기(이태백 분)와 이임례, 씨네21 제공

영화 휘모리에서 진도소리선생 이병기(이태백 분)가 이임례에게 소리를 가르지츤 장면, 씨네21 제공

진도군 옛신청터, 뉴스진도 제공

춤추고 노래하는 진도사람들, 1973, 이토 아비또 촬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