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한국개신교의 최초 전래지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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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한국개신교의 최초 전래지는 어디일까
  • 입력 : 2020. 10.29(목) 12:29
  • 편집에디터

칼 귀츨라프-위키백과

1832년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극동아시아 여정

"공충감사 홍희근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죽선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국은 영길리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중략), 조선까지는 수로로 7만리인데 법란치, 아사라, 여송을 지나고 지리아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조실록 32권 7월 21일 기사 내용이다. 개신교의 최초 선교사라는 귀츨라프 일행이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에 속하는 고대도 뒤편 바다에 정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32년이니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1884년에서 1885년보다 50여년이 빠른 시기다. 본래의 장계가 그러하듯이 배는 어떻게 생겼고, 싣고 있는 물건은 무엇이며 누가 타고 있는지 등 상세하게 조사한 정보들을 나열하고 있다. 총 67인이 타고 있었으며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 8좌 등 무력을 갖춘 상선이었다. 귀츨라프 일행은 왜 이 시기에 충남의 작은 섬(들)에 도착하였던 것일까? 이른바 대항해시대로 불리는 격동의 시기,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유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동양을 침탈하던 때이다. 무역을 빌미삼고 통상을 요구하며 때로는 전쟁을 일으켰고, 기독교 전파와 식민지 확장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동양세계 전반을 압박해왔다. 귀츨라프 일행도 선교여행 혹은 무역이라는 명분을 목적으로 한 무리들이었다. 그가 타고 있던 배의 이름은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다.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는 독일(프러시아) 출신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 선교사다. 첫 번째 여행은 1831년 6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6개월여 기간이다. 목적지는 천진(텐진)이었고 출발지인 마카오로 귀환한다. 이때 만주 타타르지역을 방문한다. 타타르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달단족이라 한다. 민족이 분화한 후 우리나라에도 대거 유입되어 유랑민으로 활동하다가 정착한 바 있다. 두 번째 여행은 1832년 2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다. 마카오를 출발해 산동반도에 갔다가 귀환하는 여정 중 우리나라에 도착한다. 7월 26일 군관 텡노라는 사람과 서기관 양씨의 안내로 애머스트호에서 내려 어떤 섬에 상륙했다가 8월 11일 떠났지만 처음 도착은 7월 17일이므로 약 3주간에 걸친 체류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여정은 아편 운반선 실프(Sylph)호에 승선해 1832년 10월 20일부터 1833년 4월 29일 다시 마카오로 귀환한다. 중국 동부 연안을 거쳐 요동(랴오둥)까지 갔다가 주산군도(쩌우산)를 거친 행로다.

귀츨라프의 서해안 여정과 도착지 논란

귀츨라프 일행이 도착했다는 곳은 어디일까? 순조실록에서 고대도 뒤편 바다라고 명시해두었기 때문에 정박지를 의심할 여지는 적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한시적 용선 계약을 맺은 애머스트호가 507톤의 상업용 범선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얕은 항구나 섬의 내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순조실록에서 적시한 고대도 뒤편은 장고도 앞쪽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감독 관리가 있었던 곳은 인근의 원산도다. 관아가 지금의 원산도 관가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군 우후 등이 나가서 조사하고 또 이런저런 교류를 한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마카오에서 출발한 귀츨라프 일행이 중국의 여러 섬들을 거쳐 조선에 도착한 곳은 조니진 지금의 몽금포 앞바다다. 귀츨라프는 이를 몽금도(대도) 근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남하하여 외연도 근처에 도착하고 녹도를 거쳐 볼모도에 도착한다. 볼모도는 삽시도에 속하는데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7월 17일 조선에 도착한 귀츨라프 일행이 처음 만난 것은 어부들이다. 이들에게 책과 단추 농어 등을 선물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올릴 통상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이후 천수만 내륙 창리까지 방문하여 전도 책자를 전달한다. 비록 한문으로 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신교 최초의 성경이라고들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귀츨라프의 일기에 나타나는 여러 섬들 중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전도했던 섬이 어디일까를 두고 논란이 많다는 점이다. 천수만 내륙까지 방문했다는 점으로 보면 어느 한 섬만을 특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귀츨라프 관련 논문들이 수십 개가 넘고 고대도설, 원산도설을 주장하는 단행본들이 여러 개 나올 정도로 논란이 되었던 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고 또 최초의 한문성경이 전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의 여정에 사용되었던 배가 아편 운반선이라는 점, 이후 중국의 아편전쟁에 통역을 맡거나 식민지 관리를 역임하는 등 깊이 관여하였다는 점을 아울러 살피지 않으면 귀츨라프의 조선 최초 선교사라는 본질적인 맥락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어느 한 섬을 특정하는 데 열을 올려 논쟁하는 것만큼 귀츨라프 행적의 과오를 함께 살피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남도인문학팁

귀츨라프 도착지는 고대도일까 원산도일까

논자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조선 관리들로부터 조사도 받고 전도도 했을 지역이 어딘가에 있다. 혹자는 고대도라고 하고 혹자는 원산도라고 한다. 고대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귀츨라프의 일기 기록에 도착지를 강갱(Gan-Keang)이라고 한데서 근거를 찾는다. 귀츨라프의 표기방식 중, 예컨대 오키나와 나하항을 기록하며 나파갱(Na-Pa-Keang)이라고 한다는 점 등을 들어 고대도 안항이 도착지라는 주장이다. 여기서의 갱(Keang)은 강을 말한다. 남도지역에서 바다를 갱번이라고 하는 점, 갯골 물길을 개옹(개펄의 웅덩이라는 의미)이라고 하는 점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원산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당시 수군과 관리들이 주둔하였던 원산도로 데려와 조사도 하고 체류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정조실록 등에 나타나는 '충청 우후로 하여금 원산도에서 선박을 점검하게 하다' 등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실제로 서해 연안의 해상 고속도로였을 물길로 보면 원산도 앞바다가 사통팔달의 요지였고 원산도 선소에서 조운선이나 기타 선박들의 점검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독 관리의 장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임시 조운창의 기능을 했던 사창이 있어 세곡의 관리도 이루어진 곳이다. 또한 원산도도 강경이라는 마을이 있어 귀츨라프의 기록 강갱과 발음상 유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관리 주둔지가 원산도의 남서쪽 마을인데 비해 강경마을은 반대편이기 때문에 관리감독의 맥락으로 주장하는 입장에서 마을이름을 덧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맥락상으로 보면 애머스트호가 정박했다는 고대도 뒤편 바다가 장고도 앞바다와 같다는 점에서 장고도일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실마리는 강갱이라는 귀츨라프의 표기일테데, 남도지역의 '갱번'이나 '개옹'의 호명처럼 바다의 갯고랑이나 포구라는 보통명사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강갱이란 말을 좀 더 폭넓게 찾아봐야겠다.

영국해군성 수로국 한반도 지도 중 애머스트호 항로(오현기, 귀츨라프와 고대도 논문 중에서)

귀츨라프 행로상 나타나는 서해안 섬들-구글지도캡쳐 복사

고대도교회-한국기독교타임즈

원산도 귀츨라프 도착 기념비(1982)-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