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자바국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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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자바국에서 온 편지
  • 입력 : 2020. 11.05(목) 11:22
  • 편집에디터

메인사진-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순다캘라파 항구에 정박중인 목선들. 2017. 9. 이윤선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남도인문학팁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슈리비자야-나무위키 복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순다캘라파 항구에 정박중인 목선 어선들. 2017. 9. 이윤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순다캘라파 항구에 정박중인 목선들 위에 노는 아이들. 2017. 9. 이윤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