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박관서> 박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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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기·박관서> 박남인 시인
박관서 시인
  • 입력 : 2020. 11.24(화) 17:03
  • 편집에디터
박관서 시인
'경우의 수'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건이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가짓수(outcomes)를 수로 표현한 것. 얼마 전 우편으로 날아온 박남인 시인의 신작시집 '몽유진도(문학들 간행)'를 보면서 경우의 수가 생각났다. 오늘날 시인에게 허여된 또는 시인이 추구하는 일반적인 삶의 목적이나 방식에서 멀리 떨어진 시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라서였다.

'밥상까지 모래바람이 들락거리고/가장 성스러운 곳 구원의 손길이 닿는/교회와 보건 진료소가 은혜로운 섬/바지락같이 작은 무덤들/제삿날이 똑같은 집이 수두룩하고'…'목포에서 하루 한 번 오후에 닿는 배/닭섬 라배도 동거차도 맹골도 미역섬 서거차도/하룻밤 자고 아침에 올라오는 여객선은/하조도 어류포를 들러 가사도를 지난다/그다음 해 가을 우리는 상조도로 옮겼다/ 선생도 전도사도 제 몫의 시간을 비웠다고 한다' (박남인 시 '관사도 2' 부분)

박남인 시인은 진도에 산다. 필자와 이십여 년 전 전남민예총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텄다. 그의 삶과 문학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그나 나나 평생을 지역이라는 세계에 묻혀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백여 년 전에 급격히 몰려온 서구문화와 일본 제국주의 문화의 짬뽕으로 태동한 한국문학은 그때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아직도 문학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면 서울이라는 공간으로 옮겨가거나 아니면 이를 배경으로 구조화된 중앙에 어떻게든 잇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밥상까지 모래바람이 들락거리고' '가장 성스러운 곳'이자 '가장 은혜로운 곳'이 '교회와 보건 진료소'인 곳에서, '바지락같이 작은 무덤들'과 '제삿날이 똑같은 집들이 수두룩'한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며 시를 길어 올리고 있는 박남인 시인의 삶과 시는 비주류를 넘어서 특이한 경우의 수로 겨우 포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제 몸을 담고 있는 공간에 묻혀서 '선생도 전도사도 제 몫의 시간을 비'우는 그것처럼 제 시간을 아예 비워버린 삶은 무엇일까. 무당이 그러했듯이 독실한 종교인이 그러했듯이 시인도 응당 그러했던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렇듯이 시간을 비운 섬에서 박남인 시인은 조선 후기 남도의 빛나는 시인이었던 초의선사를 만나고 추사를 만나고 진도 씻김굿과 같은 민속예술을 유장한 필치로 펼치다가 수년 전 소천했던 소설가 곽의진을 만난다. 이미 시간을 소거해버렸으니 이들을 만나 함께 '바다를 건너는' 무명천으로 된 질베에 오르든, '아카시아 꽃'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지는 노을'로 지든 그는 이미 무연해져 버린 것이지 않겠는가. 자신이 이미 시가 되어버린 것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기억이 얼마나 징그러운지/한 번쯤 그물망 같은 세상을 벗어나/그래 섬으로 가자/땅끝에서도 등짐을 풀지 못해/ 노화도를 건너간 적이 있지/ 석준이 선배가/시 따위에 눈을 뜨지 않았던지/송지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복직해/아무거나 안주를 시키던 밤/기념사진들이 파도에 인화되고/ 흔들린다는 것/그림자도 무거워지던 곳/꽃 여행을 꿈꾸며 노화도를 건너갔지/지나온 날의 뱃머리에 부딪히던/몇 가지 잠언들을 꺾으면서/나는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겠다' (박남인 시 '노화도' 부분)

그래. 시간을 돌아보는 기억 자체도 '얼마나 징그러운지' 모르겠다는 박남인의 삶과 시를 두고 아름답다고는 못하겠다. 더하여 존경한다는 말은 못 붙이겠다. 하지만 시인의 삶으로서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에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어떤 확률이나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을 그의 시와 삶이 그 어떤 순열이나 조합에도 쉬이 포섭될 리 없다. 더하여 그는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더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희미해져서 분명해지는 시인의 삶을 살고 있다. 가까운 시일내 그를 찾아가 진도홍주나 몇 주발 비우고 돌아와야겠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