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보성 가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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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보성 가내마을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20. 12.17(목) 11:17
  • 편집에디터

가내마을-전경

코로나19가 발길의 방향을 자주 바꾼다. 이번에도 산간 기슭이다. 외지인의 발길이 아주 드문 외딴 마을이다. 망일봉이 둘러싸고, 맑은 내가 흐르는 마을이다. 산속 마을이지만, 선각자가 많이 났다. 근현대에 27명의 박사가 나왔다. '박사마을'로 불린다.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이다. 독립신문을 펴낸 송재 서재필의 생가가 여기에 있다. 한말 의병장 이교문도 여기서 났다. 성주 이씨가 모여 살고 있다. '다정가(多情歌)'로 우리한테 익숙한 이조년(1269~1343)의 후손들이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라마난/ 다정(多情)도 병(病)인 냥 하여 잠 못 드러 하노라' 하얀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은하수가 흐르는 깊은 밤에/ 꽃가지에 깃든 봄의 정서를 두견새가 알고 저리 울겠냐만은/ 다정다감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학창시절에 얼마나 귀가 닳도록 듣고 외웠는지, 지금도 선명하다.

이직(1361~1431)의 '오로시(烏鷺詩)'도 있다. 이직은 이조년의 증손자다. 제목만으로는 서름서름하지만, 금세 따라서 읊조릴 수 있다.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이조년과 이직의 이야기는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성주이씨 세거지비'에서 확인된다. 마을사람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성주이씨 집안은 명문장가의 명성을 이어왔다. 이직의 14대손 가은 이기대(1792~1858)는 가은당, 천상재, 일감헌 등 학당 세 군데를 세웠다. 인근 지역 학자들의 발길이 잦았다. 서책 1만 권도 이웃과 함께 봤다.

이기대와 아들 이지용, 손자 이교문, 증손자 이일 등 4대의 문집도 남겼다. 가은실기, 소송유고, 일봉집, 소봉집이 그것이다. <가천세고(可川世稿)>로 번역돼 가문의 보배로 전해지고 있다. 흉년에는 양곡을 내어 이웃을 도왔다.

이기대의 5녀가 서광언과 혼인했다. 서광언은 3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당시 동복현감으로 있던 서광언의 부인이 친가에 와서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서재필(1864~1951)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이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한 그다. 마을에 서재필의 생가가 있다.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황룡이 초당 옆 뽕나무를 휘감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꾼 어머니가 그 뽕잎을 따서 갈아 마시고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난 날 그의 아버지도 급제를 했다. 집안에 겹경사가 났다고, 송재의 첫 이름이 '쌍경(雙慶)'이었다. 생가의 뽕나무가 눈길을 끄는 이유다.

서재필은 우리 민족의 선각자였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자주·자강의 근대국가 건설을 시도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3일 천하'로 끝났다.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사실상 도피였다. 대신 그의 가족이 참화를 당했다. 부모형제는 물론 부인과 아들까지 죽었다. 멸문지화였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를 배웠다. 곡절을 겪으며 고등학교와 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갑오개혁으로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귀국길에 올랐다. 화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지 12년 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와선 미국시민(필립 제이손)으로 살며 민중 계몽에 뛰어들었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협회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은 한글만으로 써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이다. 1896년 4월 7일부터 1899년 12월 4일까지 발행됐다. 독립관과 독립문도 세웠다. 나라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는 건축물이었다.

서재필은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집권 수구세력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했다.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광복 이후엔 미군정청의 고문으로 1년여 일을 했다. 48년 9월 '우리 한국사람은 단결을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생을 마감했다.

1977년 그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유해도 94년 미국에서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친일이네, 친미네 하면서 그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8년 가내마을로 가는 길목에 또 하나의 독립문이 세워졌다. 서울에 있는 독립문과 똑같이 생겼다. 서재필기념공원도 들어섰다. 유물전시관에 독립신문 등 그의 유물과 유품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생가도 그 무렵 복원됐다. 외손자를 애지중지했던 외할아버지 이기대의 묘와 함께 있다. 잡풀 관리가 힘들다고 마당에 야자 매트를 다 깔아놨다.

2003년엔 마을 입구에 보성군 항일독립유공자 추모탑도 세워졌다. 보성 출신으로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서훈을 받은 유공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을에 이의순 생가도 있다. 이의순은 우리나라의 축전지산업과 물류산업을 이끈 세방그룹의 창업주다. 1923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외자청에서 공직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한국해운'을 창업했다. 1960년이었다. 한국해운은 대한민국 최초의 선박 대리점이었다.

길손에게 방을 내주는 한옥 '목임당'도 있다. 마을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옛집이다. 돌담 위의 사위질빵이 눈길을 끈다. 유난히 잘 끊어지는 굵은 줄기를 지닌 덩굴식물이다. 사위를 유별나게 챙기는 장모를 떠올리게 한다.

마을 뒤 산자락에 자리잡은 차밭도 어여쁘다. 마을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여주는 유기농 차밭이다. '보성예성오가닉'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옛 이름 청심다원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한국차생산자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권청자 대표가 가꾸고 있다. 권 대표는 젊은층을 겨냥한 즉석 홍차음료로 차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수령 400년이 넘었다. 마을의 크고작은 일을 다 지켜본 나무다. 옛사람들의 애환도 다 기억하고 있다. 이파리를 다 떨구고 속살을 드러낸 나무지만, 한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가내마을-전경

가내마을-골목

가내마을-골목

가내마을-돌담 위 사위질빵

가내마을-돌담 위 사위질빵

가내마을-목임당

가내마을-서재필 외조부묘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

가내마을-서재필생가와 마을

가내마을-회관과 느티나무 고목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

보성예성오가닉 차밭-차와동백씨

보성예성오가닉-청심당

서재필기념공원

서재필기념공원

서재필기념공원

서재필기념공원

서재필기념관-독립신문

서재필기념관-독립신문

서재필기념관-독립신문

서재필기념관-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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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