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스런 농촌 언니들의 얽히고설킨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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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스런 농촌 언니들의 얽히고설킨 생애사
나주 여성농민회 회원 삶 통해 한국 여성사 조망||농민회 활동 통해 자아실현 과정 보여
  • 입력 : 2021. 01.21(목) 14:29
  • 박상지 기자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 조합원들이 지난해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에서 '시간제돌봄전담사 총파업 집단교섭 승리 결의대회'를 하며 시간제 전일제화·지자체 이관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억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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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생 김순애의 삶은 반은 좋고 반은 안 좋았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큰딸로 자랐으며, 아홉 살 때부터는 가난한 살림까지 도맡았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독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회고한다. 드센 시어머니를 만나 험한 욕을 말끝마다 듣고 두드려맞기도 하는 등 구박을 받으면서도 시집 식구를 위해 농사짓고 가사노동을 했다. 남편의 외도는 서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음을 가누기 힘든 일이었지만, 김순애는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장사를 시작해 자립하게 된다. '이혼해줄래, 장사를 하게 해줄래'라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이후 그는 순두부 백반집을 차리고 버섯장을 짓고 두부 공장을 하는 등 자기 손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일구게 된다. .

정금순의 어려움은 결혼 때부터 시작됐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회사를 다니던 그는 남편과 함께한 첫 외출부터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 남편은 임신 3개월부터 외도를 시작했고 생활과 양육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자식들에게 이혼 가정을 만들어주지 않으려는 마음에 오랫동안 이혼할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결혼생활을 16년이나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혼할 수 있었던 그는 '일찍 끝내지 않고 그 꼴을 당하게 해서' 자식들에게 제일로 미안하다고 한다. 이혼하고 나서는 화장품 외판원, 피부 관리사, 세신사 등의 일을 거치며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부양했다. 그래도 정금순은 그 시절이 좋았다고 회상한다. 잘못 만난 남편에 묶여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던 때보다는, 몸이 고단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스스로와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보람차고 신났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다 자라고 건강 문제로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재혼해 나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의 농촌 여성들은 자기 손으로 삶을 일구고 있는 주체다. 쌓인 한만큼 많은 열정으로 살아온 터라, 여성농민회 활동을 통해 농촌의 변혁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놀랍지 않은 일일 것이다. 특히 김순애는 제대로 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여성농민회 회장을 맡아 특유의 강단으로 한동안 농민운동을 이끈 바 있다. 정금순도 마찬가지로 여성농민회 총무로 활동하며 농촌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늦게서야 농촌에 들어왔지만, 농촌에 대한 그의 진지함과 애정은 각별하다.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이 기존의 농민운동사와 궤를 달리하는 것은, 농촌이나 농민회의 족적을 쫓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분투한 이의 사연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순애에게 농민회 활동은 결국 사람과의 일이었다. 그는 농민회의 활동 내용보다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겪은 갈등을 가슴 치며 이야기로 풀어놓는다. 더군다나 그에게 농민회 활동은 열정을 분출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장이기도 했다.

저자는 작업 내내 두 여성농민의 삶에 공감하기도 하고 거리를 두기도 하면서 나름의 주석을 붙인다. 이들이 보여주는 한과 열정 속에는 돌봄 노동,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념, 가부장제에 갇힌 욕망 등 좀더 눈여겨보아야 할 문제들이 얽혀 있다. 저자의 말대로 '억척이고 열정이고는 많은 경우 아픔 때문'이며, 그 아픔은 결국 세상과 직결돼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두 여성농민은 끝끝내 자기 삶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회고는 단지 지난날을 기술하는 데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날들을 돌아보고 다음 농사를 준비하는 거리두기의 과정일 것이다. 저자는 각 인터뷰의 후기에서 그들의 삶에 지지와 존경을 보내며, 계속해서 흔들리지 않고 걸어나가기를 응원한다. 김순애와 정금순은 앞으로도 억척스럽게 스스로를 지키고 피워낼 것이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