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마한(馬韓), 중국 사서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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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마한(馬韓), 중국 사서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록
노성태 원장이 들려주는 마한 역사 이야기-1|| 마한·진한·변한, 중국 사서 후한서 등에 기록||마한 성립시기 기원전 5세기~2세기까지 다양||고대 삼한 중 하나, 54개의 부족국가로 형성||54국 중 전남권에 내비리국 등 15개로 추정
  • 입력 : 2021. 02.03(수) 16:19
  • 편집에디터

영산강유역 마한은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800년 간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해상 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나주시 제공

연맹왕국 마한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기 유물(국보 143호)

새해 들어 백제와는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영산강 유역 마한(馬韓)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이러한 관심은 지난해 마한 역사문화권 등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올 6월 시행을 앞둔 시점과도 맞물려 있다. 전남일보는 마한이 어떤 나라였는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언제 백제에 병합되었는지,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는 무엇인지, 2천 년 전 타임캡슐 광주 신창동은 어떤 유물을 품은 유적지였는지 등에 대해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의 글을 10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마한이 어떤 나라인지를 이야기할 때 늘 안타까운 것은 마한이 우리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한의 역사를 이하려면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를 들여다보거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한(馬韓)을 비롯한 진한·변한 등 삼한에 관한 가장 자세한 문헌 기록은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이다. 마한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첫 역사서인 『삼국지』는 서진의 역사가 진수(233~297)가 290년경에 편찬한 역사책이고, 『후한서』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범엽(398~ 445)이 후한(25~220)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따라서 『삼국지』나 『후한서』에 보이는 마한은 3세기 이전의 마한일 수 밖에 없다. 이 부분도 늘 안타깝다. 영산강 유역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정치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서는 3세기 이후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던 마한 왕국의 역사를 정확하게 담아내질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참조하여 앞으로 계속 언급할 예정이다.

마한이 3세기 이전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는다. 남쪽은 왜와 접하며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예전의 진국이다. 마한의 나라로는 원양국 등 50여 개의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호구수가)만여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로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후한서』의 마한 서술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한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3종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다. 북쪽으로 낙랑,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개국이 있다. 북쪽으로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개국이 있고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 모두 합해 78국인데 '백제'가 그 중 한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여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존재한다. 땅은 모두 합하여 사방 4천여리이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모두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크다. 그중에서 진왕을 함께 세워 목지국에 도읍하여 삼한의 땅을 모두 다스린다. 여러 나라의 왕은 원래 마한 혈통이다."

두 역사서가 전하는 3세기 이전, 마한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다. 마한은 한반도 서쪽 지금의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 있었다. 54개 소국인데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에 접하고 있다. 큰 나라는 만여호였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 정도로, 인구수로 보면 수천에서 수만 명의 소국이었다. 삼한 중 마한이 가장 컸으며 마한에서 '진왕'을 세워 목지국에 도읍하고 삼한을 통치했다. 후일 마한을 병합한 백제는 마한의 한 소국이었다.

마한의 성립 시점

마한은 언제 성립되었을까? 역사적 실체로서 마한이 성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문헌 기록은 『삼국지』에 보이는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천 기록이다. 『위략』에는 연나라에서 활동하였던 위만(衛滿, 위만 조선의 창시자)이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한 다음 변방 수비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세력을 키운 뒤 한나라가 침공하니 막아야 한다고 (고조선)의 준왕을 속이고 정권을 탈취하자, 『삼국지』는 이를 인용하면서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韓) 지역으로 망명하여 한왕를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만에 쫓긴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와 한의 땅에 정착하여 왕을 칭하였다는 기사인데, 이때가 기원전 194년이다. 이는 이미 기원전 194년 이전에 '한'이라 불린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의 한은 아직 마한으로 불리지 않았고, 나중에 진한과 변한이 분리된 다음에 서로 구분하기 위해 마한이라 불린다.

그렇다면 마한의 성립 시기를 언제로 보아야 할까? 진한과 변한으로 한이 구분되던 기원전 2세기 말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마한은 진·한이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한과 동일한 정치체이므로 한의 성립이 곧 마한의 성립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한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다양하다. 가장 이르게 보는 견해는 청동기 시대 점토대 토기의 등장을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고, 가장 늦은 견해는 진한과 변한이 시작된 시기를 마한이 포함된 삼한의 출발로 본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마한의 성립은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망명하여 한왕을 칭했다는 연도가 기원전 194년이니,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초부터는 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한(마한)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마한의 성립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고조선 준왕이 망명하였던 시기에 해당하는 한의 유적·유물들이 언제부터 기존의 유적·유물들과 구분되기 시작하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고인돌과 관련된 청동기 시대의 비파형동검 문화가 목관묘(木棺墓)와 관련된 세형동검 문화로 바뀌면서 철기문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철기의 보급으로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던 청동기 문화는 점차 쇠퇴하고, 세형동검과 덧띠토기를 제작한 집단에 의해 철기문화가 확산된다. 이는 연속적인 발전이 아닌 단절적인 대변혁의 모습인데, 이 시기가 기원전 3세기경이다. 세형동검을 주조한 거푸집은 경기도 고양과 용인, 충남 부여, 전북 완주, 전남 영암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마한 54국이 존재하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철기문화로의 대변혁이 이루어진 기원전 3세기 전후가 바로 한, 즉 마한의 성립 시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한으로 성장하게 되는 한반도 서남부의 철기문화는 중국 연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충청의 아산만 일대에서 먼저 나타났다. 이는 랴오닝(遼寧) 지역의 유이민 집단의 남하와 관련이 깊다. 중국의 사서 『위략』에 "랴오닝 지역이 원래 고조선의 영역이었는데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가 침입하여 서쪽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때 철기문화를 지닌 주민 일부가 바다를 건너 아산만 일대로 망명하였고, 토착세력은 이들로부터 철기문화를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기원전 3세기 유적인 충남 아산 남성리(아산시 신창면)와 예산 동서리(예산군 대흥면) 유적이다.

즉 기원전 3세기 전후에 아산만 유역의 토착 세력은 랴오닝 지역의 철기문화를 수용하여 발전시켰고, 정치 집단들은 주변 세력과 연합하면서 가장 먼저 작은 정치 집단들이 결속하였다. 광주·전남지역에서는 화순 대곡리나 함평 초포리 유적이 있는데, 아산만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한다.

마한 54국의 위치

기원전 3세기 아산만 유역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마한 사회는 점차 서남해안 일대의 주변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3세기 후반에 작성된 『삼국지』에는 50여 국이 있었다고 하면서 목지국·백제국·내비리국 등 55국이 기록되어 있고, 5세기 중엽에 쓰인 『후한서』에는 54국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마한 54국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문헌에 기재된 한자로 된 나라 이름들이 지금 어느 지명에 해당하는지가 중요한데, 한자 발음의 유사성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54국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마한 전체 지역에 대한 균등한 조사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마한 54국의 위치가 지금 어디인지를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병도(삼한 문제의 신고찰, 1936), 천관우(마한제국의 위치 시론, 1979)가 대표적이며 박순발(마한 사회의 변천, 2009)도 한자의 음과 운(音韻)에 의거해 비정을 시도한 바 있다. 마한 54국 중 전남권에는 구사오단국, 불미지국, 내비리국 등 15개 정도의 소국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