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강래> 대학의 책무와 지역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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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이강래> 대학의 책무와 지역공동체
이강래 전남대학교 부총장
  • 입력 : 2021. 04.15(목) 13:47
  • 편집에디터
이강래 전남대 부총장
'벚꽃 피는 순서로 대학이 망한다.'는 말은, 이 봄날 더 이상 은어(隱語)도 아니고 참언(讖言)도 아니다. 유례없는 규모의 신입생 충원 미달로 야기된 충격 가운데서, 우리 지역 대학들의 벚꽃 보는 시선이 온화할 리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살벌한 은유를 마치 유행어처럼 주고받는 기이한 일상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아마도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 사람이 거스르거나 간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 연원일 것 같기는 하다. 두려운 일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벚꽃을 들어 대학의 명운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아니면 음모적이다.

"단풍 드는 순서대로 대학 정원을 감축하라."는 항의는, 그러므로 '벚꽃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패러디이자, 문득 실천적 대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단풍론'은 이른바 '수도권'의 가파른 흡인력 앞에서는 허망한 수사에 불과하다. 수도권을 옹위하는 배타적 남방한계선은 갈수록 더 강고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비수도권 대학의 참극은 '예견된 미래'였다고들 한다. 출산율의 저하와 그로 인한 인구 절벽은 갑작스러운 재난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어떤 분은 지방대학의 경쟁력 부재가 본질이라고 말한다. 비인기 대학과 학과는 과감하게 청산하는 게 그나마 '살길'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학문을 인기로 재단하고, 각자도생의 반문명적 논리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횡행하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더군다나 전국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곳은 정작 서울이지 않은가. 지방에 젊은 인구가 적은 이유도, 취업에 성공하여 수도권으로 가고 취업을 위하여 수도권으로 가기 때문이다.

수도권 인구는 이미 비수도권 전체 인구를 추월하였다. 소득의 집중도는 훨씬 더 심각하다. 저들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이 '파멸적 집중'의 필연적 귀결 역시 '예견되는 미래'일 뿐이다. 오직 충원율과 취업률의 잣대로 강요된 비수도권 대학의 자멸은 수도권 고밀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블랙홀의 종말에 대한 암울한 전조와도 같다. 국토의 한 부분이 자기 운동력을 상실하고 소멸의 평형 상태로 함몰되기 시작하면, 그 전염력은 활엽수의 북방한계선이 빠르게 올라가듯 이내 수도권을 덮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권의 자폐적 구심력을 해체하고 지역의 원심력을 키워야 옳다. 2005년 이래 공공기관의 이전과 혁신도시의 건설은 그 하나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혁신도시들의 오늘은 여전히 수도권을 향해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버스의 행렬로 저물어간다.

애초에 겨레의 삶터를 중앙과 지방으로 분별하는 사고가 몽매하거나 무례한 것이다. 삶의 행정 공간이 존재의 존엄과 자아실현의 당위에 우선할 수는 없다. 왕경인과 지방민을 차별했던 위계는 천 수백 년 전 신라 시대의 화석에 불과하거늘,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들은 특별시민과 일반시민의 간극을 토양 삼아 팽대해가고 있다. 예컨대 서울특별시는 곧 대학특별시이기도 한 것이다.

헌법은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국가에 부여하였다. 근자에 국토교통부, 교육부, 중소벤처기업부가 함께 추진한 '캠퍼스 혁신파크 조성사업'은 보기에 따라 미온적이나마 국가의 응답일 수 있다. 교육부가 제안한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사업' 역시 같은 범주에 있다고 여긴다. 이 사업의 목표는 대학의 혁신 역량을 극대화하고 지역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청년의 지역 정착을 이끈다는 것이다. 전자 역시 대학 내에 고밀도 산학협력 생태계를 구축하여, 첨단산업의 일자리 창출과 창업 및 성장 기업의 생존율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

전남대는 이 두 사업의 참여 주체로서 각각을 총괄하거나 주도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학들에 힘을 모아준 우리 지역의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고민할 바이지만, 쉽지 않은 숙제이다. 본디 대학이란 '어떻게'에 대한 해답 너머에 있는 '왜'라고 하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기업의 생산 구조 말단에 배치된 지역의 군소 기업들도 고뇌가 깊다. 정직하게 말해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연구단지, 영국의 케임브리지 과학단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기술단지 등 선행 사례들과 우리 사이에 가로 놓인 격절이 결코 간단치 않다.

다만 교육혁신으로 지역의 경제와 문화의 창달에 기여해야 할 책무가 있는 대학에게 저러한 숙제는 자기 성찰의 토대이자 기회라는 것을 각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대학이 시장의 차가운 논리에 떠밀려 본래의 사명을 외면하거나 위엄을 손상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꾸짖는 일은, 또 지자체와 시민사회의 몫이겠다. 그리하여 교정에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당당한 주체들이 붐빌 때, 지역 공동체의 건강과 유대도 짙어갈 것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