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 선녀여왕과 월광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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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기·김강> 선녀여왕과 월광 소나타
김강 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1. 04.20(화) 14:35
  • 편집에디터
김강 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선녀여왕.' 원제목은 페어리 퀸(The Faerie Queene), 요정여왕 혹은 신선여왕으로도 번역된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 영국 르네상스 시대에 희곡의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에드먼드 스펜서가 1580년대 약 10여년에 걸쳐 쓴 우화적인 장편 서사시다.

그는 고풍스러운 시어를 통해 중세 영국의 사회상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 '캔터베리 이야기'의 작가 제프리 초서의 문학적 유산을 전승해 후일 청교도 혁명의 풍운아 존 밀턴의 '실낙원'과 윌리엄 워즈워스, 존 키츠, 로드 바이런 등 낭만주의 문단을 풍미한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며 존경을 누렸다.

156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스펜서는 10년 후 시집 '양치기의 달력'을 발표해 일약 대시인의 위치를 구축하며 '스펜서리안 소네트'의 개척자로 인정 받는다. 그러나 그의 포부는 엘리자베스 1세 궁정신하로서 여왕의 총애를 오롯이 받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선녀여왕'이라는 자작시를 여왕에 헌정한다. 이 작품이 사회적 명망과 정치적 입지는 물론 금전적 보상도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연모의 대가는 고작 소액의 연금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즉위 후 국무장관, 재무장관을 거치며 여왕의 제일 비서이자 핵심참모였던 윌리엄 세실과 정치적 적대관계에 놓인 탓이다. 서사시의 대가로 연간 100파운드를 바랬던 시인에게 세실은 "겨우 시 하나로 그렇게까지 원하는가!"라며 냉소했다.

스펜서의 시는 엘리자베스 1세를 모델로 하는 선녀여왕 글로리아나를 모시는 아서왕과 12명의 기사들이 12일간의 축제동안 신성, 정제, 정숙 등 12개의 기독교적 덕목을 완수하는 모험을 담고 있다. 여왕의 인격과 가치를 신화적으로 규정한다. 요샛말로 비꼬자면 스펜서가 엘리자베스에게 바치는 용비어천가인 셈이다.

요즘 이곳에서도 스펜서를 모방한 듯한 정치인의 행보가 화제다.

'월광 소나타.' 독일의 고전파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의 별칭이다. 비창, 열정과 더불어 그의 3대 소나타로 불린다. 그가 붙인 원래 부제는 '환상곡풍 소나타'였지만 음악평론가 루드비히 렐슈타프가 곡 1악장을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로 평한 후 '월광'으로 더 유명해졌다.

고지식해 보이는 초상화와는 달리 이 곡은 로맨티스트로서 그의 이면을 보여준다. 첫사랑 실패 후 청력까지 잃어가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제자이자 연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이다. 그래서일까, '월광'에서는 잔잔함에서 격정으로 변하는 사랑의 열정이 고뇌처럼 느껴진다.

'월광'은 드라마, 영화, CF 등 다양한 영상예술 분야에 감초처럼 활약했지만 최근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된 한 정치인이 유튜브 채널에서 이 곡을 생중계 한 탓에 이제 정치계로 진출하게 됐다. 한 여성이 악보를 응시하며 피아노를 치던 중 애잔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저는 월광 소나타, Moonlight 달빛 소나타가 대통령의 성정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조만간 정부가 소나타의 3악장에 도달해서 검찰개혁을 완수하고 그동안 조용히 추진하던 정책들이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를 기원합니다." 그다음 대통령과 팔짱 낀 사진들이 화투패 처럼 화면에 깔린다. 영어에서 '문라이트'는 남몰래 하는 부업이라는 의미도 있다.

피아노 실력은 차지하더라도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을 향한 공개적 헌사는 상당히 낯 뜨겁다. '덕분에' 지난 총선에서 낙선 후 청와대로 직행할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하를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펜서와는 사뭇 다른 결과다.

신임 대변인은 수학교양서 베스트셀러 저자로 교육자출신이다. 과거 제자 논문을 표절한 의혹에 미국유학파 답게 "클리어"됐다고 반박했다. 이번 취임인사에서도 "대변인은 영어로 '스폭스퍼슨'(spokesperson)"이라고 한다면서 청와대의 의견을 말하는 동시에 민심을 듣고 전달하는 "청취자, '리스너'(listener) 역할"도 충실히 하겠다고 밝혔다. 대변인은 '티칭' 보다는 '리스닝'이 우선이다.

선녀여왕과 월광 소나타. 상대의 마음과 손길을 내게로 돌리려는 심리적 지향의 상징이다. 그 의도가 사적이든 공적이든 혹은 대가가 무엇이든 나의 자세는 정직해야 한다. 권력자에 그저 맹종하는 충신 플레이에 그치면 안되기 때문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