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괄 콘텐츠 디렉터 김홍탁의 '인사이트'> 후각디자인으로 형상화 한 제주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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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콘텐츠 디렉터 김홍탁의 ‘인사이트’
총괄 콘텐츠 디렉터 김홍탁의 '인사이트'> 후각디자인으로 형상화 한 제주 4·3사건
  • 입력 : 2021. 05.09(일) 16:15
  • 편집에디터

김홍탁 총괄 콘텐츠 디렉터

며칠 전 제주도에 바람 좀 쐴 겸 다녀왔다. 바람을 쐰다는 것은 바쁜 와중에 여유를 즐기겠다는 의미지만, 나에겐 말 그대로 바람을 맞겠다는 의미도 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지역 특유의 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 바람에선 건강한 비릿내가,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엔 흙냄새가, 산바람에선 식물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냄새가 콧속을 맴돈다. 해외 여행시 그 나라를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공항을 나왔을 때 훅 끼쳐오는 공기의 냄새다. 후각이 민감한 내겐 냄새에 기억이 뭉쳐있다.

제주엔 아픔의 냄새가 있다. 4·3사건의 냄새다. 땀냄새와 피비린내도 있을 터이고, 화약 냄새와 시신이 썩는 냄새도 있을 터이다. 무엇보다 얼굴에 겹겹이 찌들어 붙은 눈물의 냄새도 있을 터이다. 학살과 분노의 상황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객관화된 냄새의 표현이다. 그러나 나는 그 냄새를 주관화 할 수는 없다.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냄새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사람을 만났다. 놀랍게도 그는 노르웨이 사람이다. 2021년 광주비엔날레가 어제 9일 막을 내렸다. 본관, 국군광주병원,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세군데의 전시장을 둘러본 나는 아트폴리곤의 한 작품에 눈길이 꽂혔다. 아니 코 속의 세포가 활짝 열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노르웨이 작가 시셀 톨라스(Sissel Tolaas)는 그녀의 작품 'EQ_IQ_EQ'에서 4월3일을 겪은 제주도의 기억을 냄새로 풀어 냈다. 화학자이기도 한 톨라스는 '스멜 리_서치랩 베를린(SMELL RE_searchLab Berlin)'을 설립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수천 가지 조향 데이터를 매핑해 온 냄새 전문가다. 그녀의 작업은 한마디로 냄새의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다

지형도를 그린다는 것은 냄새를 통해 지식의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그 점이 그녀가 가진 독특함이다. 후각지식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그녀의 작업은 4·3사건을 주제로 한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의 위계를 통해 절대 섞일 수 없는 신분의 위계를 드러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 점이 가난을 후각으로 풀어낸 봉준호의 빛나는 인사이트다. 후각의 사회학이라 할만하다.

톨라스의 인사이트를 자극한 것은 70년 동안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온 제주도민 양신하씨의 일기였다. 4·3사건 때 중학생이었던 그는 큰 형을 잃었다. 섯알오름 능선 부근이었다 한다. 군경이 막는 바람에 시신을 찾지도 못했다. 그의 일기는 4·3사건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군대가는 날 아침의 이야기 같은 일상의 잔잔한 에피소드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어머니께 문안인사 드린 후 어머니가 따라오지 않길 바라며 뛰었지만, 동산을 4개나 넘어야 하는 비포장길 15㎞를 끝까지 뒤따라와 버스차창 밖에 서 계신 어머니. 그 정황을 묘사한 1960년 10월24일의 일기가 그렇다. 일기가 가질 수 있는 소소한 기록의 힘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것인데, 그 모든 스토리를 관통하는 맥락은 결국 4·3사건에 닿아 있다. 어느 날의 일기든 4·3의 아픈 기억이 떨쳐 낼 수 없는 혼령처럼 붙어있다.

톨라스는 양신하씨의 일기 37편을 발췌한 후 그것에서 받은 영감을 37개의 둥근 자갈 형태의 현무암에 향기로 심었다. 37개의 스토리가 37개의 향으로 태어난 것이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에서는 톨라스가 해석한 주관화된 4·3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관객들은 먼저 돌을 집어 향을 맡아본 후 돌에 붙어있는 날짜 태그를 확인하고 벽에 진열된 같은 날짜의 일기를 읽게 된다. 주관화된 추상적인 냄새가 4·3사건을 아트로 형상화한다.

디자인은 생각을 디자인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컨셉트 워크(concept work)다. 시각디자인은 시각적으로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간판과 표식은 모두 시각디자인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같은 감각기관으로 인간의 몸에 장착되어 있으면서도 후각은 창작 형태로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다. 후각디자인이란 말이 널리 통용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각디자인은 후각적으로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톨라스는 냄새를 통해 4·3사건을 해석했다. 관람 날 후각에 각인된 톨라스의 향을 통해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4·3사건을 기억하게 됐다. 지금까지 글과 사진과 그림을 통해 내 몸에 각인됐던 4·3사건의 참상과 제주도민의 고통의 지형도에 새로운 길이 났다. 냄새로 기록한 4·3사건의 새로운 챕터가 형성된 것이자 후각의 고고학이 형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봄날의 라일락 향기와 최루가스의 매콤함이 뒤섞였던 1980년대 캠퍼스가 콧속에 맴돈다. 그 냄새의 기억없이 1980년대는 온전히 기록될 수 없다.

#4·3사건 #후각디자인 #광주비엔날레 #시셀 톨라스

노르웨이 작가 시셀 톨라스의 작품 'EQ_IQ_EQ'.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