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한반도 심장 관문… 새로운 미래는 어떻게 올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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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한반도 심장 관문… 새로운 미래는 어떻게 올것인가
덕적도에 대한 명상||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니||문헌상 최초의 우리나라 섬 이름||당·신라 연합, 신라 칠 때 징검다리||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역할도||두 사건 모두 역사의 큰 기점 형성||언젠가 코앞 북한으로 왕래하는 배||출항하는 날만 기다릴 뿐이다
  • 입력 : 2021. 05.27(목) 15:18
  • 편집에디터

덕적도. 이윤선

서기 660년 6월,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 13만 명이 한반도로 물밀듯 건너온다. 산동반도 성산을 출발한 군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이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전선 100척 군사 오만 명과 태자 김법민을 보내 영접한다. 당군과 합류하니 18만 명, 백제군이 감당하지 못할 위력의 나당연합군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6월 20일 이들이 합류한 곳이 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다. 왜 덕적도였을까? 그것은 서해의 물길과 유사 이래 명멸했던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대립 혹은 네트워크를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다. 갯벌의 노두, 강변의 징검다리라고나 할까. 지금도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항선들 길목이 덕적도의 작은섬 소야도와 건너편 소이작도 사이 물길임을 주목할 수 있다면 왜 이 섬인가를 알 수 있다. 예성강과 한강 아니 한 시대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양을 오가기 위해서는 대개 이 수로를 건너야 한다. 중국의 여러 해안은 물론 일본과 동남아를 오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덕적도에 도착한 소정방은 법민에게 7월 10일 사비성을 치자고 제안한다. 왜 바로 부여로 내려가지 않고 20여일 덕적도에 머물렀을까? 항간에는 4개월여 머물렀다고도 한다. 20여일 머문 데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대규모 군사로 위협을 해서 싸우지 않고 백제를 주눅 들게 하는 전략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물때와 해류 특히 내안의 조류 흐름을 기다렸다는 해석에 나는 무게를 둔다. 음력 6월이면 지금의 양력 7월 그야말로 삼복더위다.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기에 불리하다. 더군다나 식수와 군량미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을 작은 섬에서 20여일을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답은 해류와 조류에 있다. 일 년 중 바닷물 수위가 가장 높은 때가 7월 백중사리다. 여름철이면 난류가 한류를 밀어내며 거대한 해류가 북상하고 겨울철이면 한류가 난류를 밀어내며 남하한다. 여기에 조석간만의 조류 흐름을 잘 읽고 조간대의 연안과 강의 갯고랑까지 읽을 수 있어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바다에서 바라본 덕적도. 이윤선

설화로 남은 소정방과 덕적도

덕적도의 작은섬이 소야도이고 소야도의 큰섬이 덕적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니 문헌상으로 최초의 우리나라 섬 이름이다. 덕적도의 작은 섬 소야도(蘇爺島)는 소정방의 이름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소(蘇)는 소정방의 성씨요 야(爺)는 아비 혹은 신이라는 뜻이다. 소정방이 신라의 아비라도 된다는 뜻일까? 소야도 노인회장의 구술을 들으니 관련 이야기가 한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헐렸지만 소야도초등학교 해변을 '담안'이라고 한다. 흩어진 주춧돌들이 있었다는데 이를 당나라 군대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소야도 남동쪽 끝 즉, 소이작도를 바라보는 해안 이름이 '진대끝' 혹은 '진대골'이다. 당나라의 군대가 진을 치던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여기에는 마치 실제 사용한 듯한 돌절구 형식의 바위가 있다. '진대끝돌절구'라 한다. 이 또한 당나라의 군대와 연관시켜 해석한다. 소야도 아홉 개의 경치 중 하나로 꼽는 곳이다. 진대끝에서 당나라 군대 본부가 있었다는 곳까지 연결된 긴 모래사장을 '감'이라고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밟고 이동했기 때문에 갯벌이 굳어져 단단하게 되었다나. 실제 소야도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해안으로 돌지 않고 단단한 '감' 갯벌을 가로질러 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소정방의 덕적도 주둔 사실은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은혜를 입었다는 점에서 이런 시선들이 생겼을까? 팩트와 픽션을 뒤섞은 팩션의 확장이 어디까지인지 좀 더 들여다봐야겠다. 어쨌든 중국의 황족 전횡을 마을 시조로 여기는 외연도 등 일부 섬이나 서복의 경유지 및 도착지로 알려진 지명들과 더불어 대중국 교류관련 흔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덕적도. 이윤선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다시 1950년 9월의 장면 하나, 민족동란으로 한반도가 피로 물들 무렵, 일군의 해병대가 덕적도에 상륙한다. 지금의 '밭지름' 앞 모래사장이다. 밭지름은 참사진이 있던 소재지(지금의 진1리)의 바깥에 있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덕적도사(1985)는 이곳을 당나라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해석하고 있다. 상륙 해병대는 주민들을 공산군 세력으로 오인했던 것인지 민간인 여섯 명을 총살한다. 송은호(진리, 90세)씨는 지금도 열여섯 살 당시의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덕적도와 건너편 영흥도에 진을 친 해병대의 엄호로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이후 서울수복 및 한국전 종료와 삼팔선의 경계 굳히기 등의 역사는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영흥도를 비롯한 덕적도가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상고해보니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가 백제를 칠 때도 이 섬을 징검다리 삼았고 유엔군이 북한을 협공할 때도 이 섬을 교두보 삼았다. 두 사건 모두 우리 역사의 큰 기점을 형성한다. 이 사건뿐이겠는가. 이 항로에 얽히고설킨 하고많은 역사가 있지 않겠는가. 개경과 한양 등 한반도 심장부의 관문 역할을 했던 덕적도에서 중국을 바라보며 망연한 며칠을 보낸다. 소정방과 맥아더를 견주어 명상한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날은 바람 고요하나 물길 드세 뱃길이 막히고 어떤 날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배들이 들고난다. 역사 이래 발해 연안을 돌아 나선 중국의 배들은 천개의 북한 섬들을 지나 이곳 덕적도를 지나갔을 것이다. 이어도, 가거도를 거친 동남아시아의 배들도 또한 서남해 연안 무수한 섬들을 비껴 한반도의 어딘가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는 어떤 외세들이 혹은 시절들이 덕적도에 머물러 한반도의 미래를 재구성하게 될 것인가. 섬이란 그런 것이다. 국토로 따지자면 나라의 최전선이자 관문이요, 인문으로 따지자면 우리 마음의 이상향이다. 코앞 북한으로 왕래하는 배가 언제 출항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기다릴 뿐이다. 파도 그치고 바람 자는 날 불현듯 어떤 선주 나서 황해도 해주 가는 배편 출발한다고 항구마다 외고 다닐 것이기에.

남도인문학팁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의 역사

<옹진군의 역사>를 인용해 덕적도 공부 자료로 삼는다. 덕적도는 우리나 섬 가운데 기록상으로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나 '당서' 등에는 신라와 당나라 교통상의 요지로 덕물도(德物島) 혹은 득물도(得物島)라 한다. '고려사' 지리지 당성군 조에는 인물도(仁物島)로 표기되었다. '고려사' 고종 46년 2월조에 덕적도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다(徒西京黃州民于德積島). 덕적도사(1985) 등에는 '덕물'에 가까운 발음이라 하여 '큰물섬'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物)과 수(水)를 발음상 유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서해의 큰물길이라는 뜻이겠다. 본래 고구려 세력권에 들었다가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지금은 북한의 옹진과 인천의 옹진으로 나뉘었다. 덕적이라는 지명은 개성과 장연 사이에도 있다. 여기에 덕물산이 있는데 덕적도 국수봉이나 소야도 국사봉과 친연성이 높다. 소정방이 여기 올라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나 왕이 아플 때 이 봉우리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 등은 덕적도의 만신 김매물의 맥락과 함께 차후 소개하겠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