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에 분노… "조국이 부른다" 글 쓰고 항쟁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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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에 분노… "조국이 부른다" 글 쓰고 항쟁 참여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Ⅲ)또다른 영웅을 기억하는 이들 ①광주 대동고 전영진 열사||계엄군 폭행에 분노… ‘조국이 우리를 부른다’||가족 몰래 시위대 합류, 5월21일 총격 사망||동창들 “영진이는 쾌활하고 재밌었던 친구”
  • 입력 : 2021. 06.03(목) 17:11
  • 김해나 기자
1980년 5월 대동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전영진 열사.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제공
"41년간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았죠. 그날, 내 꿈도 영진이 꿈도 모두 사라지고 묻혔어요."

5·18민주화운동이 41주년을 맞았지만,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듯하다. 특히 10대의 나이로 국가 폭력에 저항했던 어린 열사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한켠에 늘 큰 서글픔을 안고 살고 있다.

전영진 열사. 1980년 5월 당시, 대동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광주에 군대가 오기 전까지는 대학 생활을 꿈꾸던 학생이었다.

당시 고3 수험생이던 전 열사의 인생이 변한 것은 1980년 5월19일이었다. 이날 도교육위원회에서는 초중고 수업을 오전으로 단축하고 다음 날인 20일 하루 동안 휴교할 것을 지시했다. 이날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너무 억울해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전 열사는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지 모르겠다"며 시위에 합류하려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시위 참여를 극구 반대하자 그날은 참았다. 하지만 21일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을 때 그는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가족 중 누구도 그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항쟁에 참여한 전 열사는 투쟁을 위해 트럭 뒷좌석에 앉아 이동하던 중 당시 노동청 인근서 계엄군의 총격에 머리를 맞고 숨졌다.

전 열사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던 방창현 씨는 트라우마로 고통 속에 살았다.

전 열사 사망 당일, 전 열사가 방 씨의 자취방을 찾아 '금남로 시위에 가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이들은 근처 다른 친구 집에 '조국이 우리를 부른다, 전영진, 방창현'이라는 글을 남기고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전남도청 근처에서 시위하다가 총소리를 듣고 1톤 트럭에 함께 올랐다.

계속해서 총소리가 들리자 방 씨는 뒷좌석에 앉은 전 열사가 걱정됐다. "영진아 앞으로 와"하고 뒤를 봤을 땐 전 열사는 총에 맞은 후였다.

전 열사가 총에 맞으니 놀란 사람들이 트럭에서 모두 내렸다. 운전사는 시신을 싣고 병원으로 향했고 방 씨 역시 하차했다. 당시 자신도 모르게 트럭에서 내려 멍하니 트럭을 바라봤던 것, 병원에 가서 친구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던 것 등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상처로 남았다.

전 열사를 아는 주위 친구들에게도 원망 섞인 소리를 들었다.

동창생 김향득·이덕준(59) 씨는 전 열사가 수업에서든 시위에서든 적극적인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이덕준 씨는 전 열사를 유쾌한 친구라고 떠올렸다.

대동고 2학년 당시 전 열사와 같은 반이었던 이 씨는 "빵집에서 미팅도 하고, 공부도 함께 하는 친구였다"며 "무엇보다 우리 영진이가 잘생기지 않았는가"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씨는 1980년 교내 4·19 기념 점거 농성, 같은 해 5월 16일 '횃불 성회', 5·18 당일에도 전 열사와 함께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이 씨는 전 열사와 시내에서 시위하다 배가 고파 금남로 쪽 친구의 집에 갔다. 점심을 먹고 다시 나가려는 순간 공수부대 투입 현장을 목격했다.

이 씨는 근처 나무 밑에, 전 열사도 어딘가로 숨으면서 이들은 흩어졌다. 이 씨는 다시 시위에 합류해 전 열사를 찾았지만, 점심을 먹고 흩어진 모습이 전 열사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이 씨는 "5월19일부터 영진이랑 수학 과외를 시작하기로 했었다"며 "그렇게 헤어진 이후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받고 영진이의 죽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전 열사의 동창 김향득 씨 역시 그를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친구'로 회상했다.

김 씨는 "대동고에서 단체로 데모를 할 때 영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던 기억이 난다"며 "조용하고 순수한 아이였지만,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만큼은 확실한 아이였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전 열사와 고교 1년 때 처음 만났다. 같은 반이 된 후 함께 탁구를 즐겼다. 당시 존 트라볼타가 출연한 '토요일 밤의 열기'와 유행하던 무술 영화를 보고는 춤을 추거나 무술 흉내를 내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는 학생이었다. 예능 감각이 뛰어나 소풍 등 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친구였다.

고교 2년이 되고 반이 달라졌지만, 김 씨는 여전히 전 열사와 탁구 경기를 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현 다산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 선생님을 만났다. 김 씨는 "박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쳐주시며 한자와 사상 등도 알려주셨다"며 "영진이도 나도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사회 부조리나 정의 등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청천벽력 같은 전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으로 인해 김 씨는 국사 선생님이었던 꿈을 묻어두고 영진이를 생각하며 카메라를 들었다.

김 씨는 5·18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가 됐다.

김 씨는 "영진이는 남들 다 하는 자기 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건너 들은 것이 '법대에 진학해서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얘기였다"며 "영진이가 살아있었다면 가끔 만나 술 한 잔씩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텐데 41년이 흐르는 동안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고 씁쓸해했다.

이어 "영진이는 항쟁 당시 노동청 근처에서 총을 맞았다. 관자놀이를 관통했다고 들었는데 집단 발포 때 마구잡이로 쏜 것이 아닌 저격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며 "이를 조사하는 것 또한 남은 우리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대동고 교정에는 전 열사의 순의비가 있다. 매년 5월이면 총동창회에서 추모식을 진행한다.

김해나 기자 min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