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하면 또 새 피 나와'라며 해맑게 웃던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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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하면 또 새 피 나와'라며 해맑게 웃던 내 동생"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 (Ⅲ) 또다른 영웅을 기억하는 이들 ④춘태여상(현 전남여상) 박금희 열사||헌혈하고 돌아오다 총격 숨져 ||간호사 꿈꾸던 언니같은 동생 ||부모님 모두 금희 기일때 사망
  • 입력 : 2021. 06.24(목) 17:13
  • 김해나 기자

박금희 열사가 교내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는 모습. 박금숙씨 제공.

박금희 열사가 친구들과 해맑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박금숙씨 제공.

5·18민주화운동 당시 춘태여자상업고등학교(현 전남여상) 3학년이었던 박금희 열사.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제공

"막둥이가 죽고 내가 막내가 돼 브렀어. 41년이 지나도 선명하니 안 잊혀지제. 동생 찾으러 다닐 때 어머니 입으셨던 옷도 선명하게 기억나고…"

41년이 지났지만 언니는 지금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먼저 떠난 동생을 생각한다. 언니 마음 속 상처는 세월이 치유해주지 못한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춘태여자상업고등학교(현 전남여상) 3학년이었던 박금희 열사.

박 열사는 1980년 5월21일 "사람들이 죽어간다. 피가 필요하다"는 절박한 목소리에 동참한 여고생이었다.

그날도 그는 기독병원을 찾아 평소 자주 하던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였다. 광주 상공에서 시민군의 무장 해제를 종용하던 헬기가 박 열사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박 열사는 계엄군이 헬기에서 쏜 M16 총탄에 머리와 배를 맞고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광주의 꿈 많고 착했던 한 소녀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숨을 거뒀다.

박 열사의 언니 박금숙(63) 씨는 동생을 배려심이 많고 쾌활하며 뭐든지 앞장서서 하는 '언니 같은 동생'으로 기억했다.

박 열사는 당시 학교에서 선도부장을 맡을 정도로 책임감이 남달랐고 노래도, 기타도, 연극에도 다재다능해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박씨는 "동생이 동명여중을 다닐 당시 우수생에게 '우수 배지'를 줬다. 항상 그 배지를 차고 다닐 만큼 공부를 잘하고 영리했다"며 "손끝이 야물어 학교에서 하는 '만들기 수업' 등도 어른 못지않게 잘했다. 뭐든 하기만 하면 손 볼 것 없이 완벽하게 잘하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4남 4녀 중 일곱째와 막내였던 박씨와 박 열사는 3살 차이로 친구처럼 지내는 자매였다.

박 열사는 막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과 당당함으로 언니, 오빠가 잘못한 게 있으면 따질 만큼 다부진 성격이었다.

사망하기 3일전인 1980년 5월19일에도 박 열사는 헌혈을 하고 왔다.

박씨는 "동생이 그날 집에 와서는 '언니, 헌혈하니 속이 울렁울렁하고 메슥거려. 힘들어'라고 말했다"며 "금희에게 '네가 잘 먹고 잘사는 집 애도 아닌데 왜 헌혈을 해서 힘들어하냐'고 타박하니 '언니, 헌혈하면 또 새 피가 나와!'라며 해맑게 웃던 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박 열사는 중학생 때부터 곧잘 헌혈을 해왔었다.

항쟁 때도 자신의 피를 나누려 병원에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박씨는 "그날 금희가 자꾸 나가려고 해서 어머니가 방문을 잠근 채 가둬놨다"며 "화장실을 간다고 해서 문을 열어줬더니 그사이에 나가서 변을 당했다. 동생이 집에 오지 않아 어머니, 이모와 충장로 일대를 다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박 열사가 총을 맞고 기독병원으로 옮겨질 때 박 열사의 학교가 제일 먼저 그의 죽음을 알렸다.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이는 모두 '폭도'였으니 학교에서도 동생의 시신을 집으로 가져가라고 요구했다. 학교 측에서는 교내 학생 중 '폭도'가 있으면 안 됐으니 말이다.

박씨는 "당시 부모님은 총을 맞아 죽은 자식을 눈앞에서 보시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시신이 부어서 옷과 시계로 동생임을 확인했다"며 "가족 모두가 제정신으로 생활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길가에 널브러진 주인 모를 신발과 최루탄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금희는 간호사가 되고 싶어 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한 '희생 정신'이 뛰어난 아이였다"며 "가시내, 지가 불사조인지 안가베"라고 씁쓸해했다.

동생의 죽음은 가족들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박 열사가 숨을 거두고 그의 부모님은 매일 술에 의존해 살아갔다.

슬프게도 박 열사의 아버지, 어머니 모두 다른 해 5월21일에 눈을 감았다. 이 가족들에게 5월21일은 슬픔과 고통의 날이 됐다.

박씨는 "학생들을 보면 아직도 동생이 생각난다. 내 기억 속의 동생은 교복 입은 단발머리 소녀로 정지돼 있기 때문이다"며 "부모님 두 분이 얼마나 한이 됐으면 자식 죽은 날에 눈을 감으셨을까 싶다. 그래도 부모님이 가신 후 '금희가 혼자 있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밀어 넣은 발포 명령자를 규명하는 일은 여전한 숙제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누군가의 가슴 속에는 동생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으니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불꽃 같은 마음을 가진 동생이 자랑스럽다"며 "진실은 밝혀진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가해자의 태도가 가소롭다. 항쟁 당시 직접 가담했던 상급 명령자들의 증언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고 강조했다.

박금희 열사의 헌혈 증서. 박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이전에도 꾸준한 헌혈에 참여했다. 생년월일은 당시 수기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오타가 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열사의 생년월일은 1962년 7월13일이다. 박금숙씨 제공

박금희 열사가 교내에서 진행한 연극에서 친구들과 무대에 오른 모습. 박금숙씨 제공.

김해나 기자 min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