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죽음은 제게 부채의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친구가 꿈꾸던 민주주의 참세상을 이루기 위해 민주 시민 교육에 더욱 힘을 쏟으려 합니다."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은 친구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박관현(1953.6.19~1982.10.12) 열사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고 고백했다.
장 교육감은 박관현 열사와 광주동중, 광주고 동기 동창이다. 6년 간 같은 반을 네 번이나 했다.
다소 내성적이고 얌전했던 장 교육감은 당시의 박 열사를 '영광군 불갑면 촌놈이지만 털털하고 공부도 잘했던' 학생으로 기억했다.
1978년 9월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에 복학한 장 교육감은 전남대 법대 앞에서 박 열사를 다시 만났다. 정의로운 법관을 꿈꾸며 공부에 매진하던 박 열사에게 장 교육감은 '독재 정권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이 날 이후, 박 열사가 도서관을 찾는 날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해 12월 박 열사 포함 10명이 광천동 시민아파트 앞 신협 사무실 옆방에서 숙식을 하며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 조사를 진행했다. 들불야학 강학들의 제안을 계기로 시작된 실태 조사는 두 달 넘게 진행됐다. 합숙 장소도 들불야학 학생들이 공부하던 시민 아파트 교실로 바뀌었다. 길고 고된 실태 조사는 이듬해 2월에 보고서 형태로 완성됐다. 그동안 어느 기관에서도 진행된 적 없는 최초의 작업이었다.
조사 기간 동안 쌓인 동지애로 이들은 전남대 안에 '사회조사연구회'를 창립, 본격적으로 노동 실태 조사 활동을 전개했다. 1980년 수많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배출된 전남대 최고 사회과학 서클의 탄생이었다. 창립 멤버였던 박 열사와 장 교육감은 그 즈음 '들불 야학'에서 선배인 윤상원 열사와 함께 강학 교사로도 활동했다.
19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박 열사는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5월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에서의 연설은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마음을 울렸다.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 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명연설을 마친 박 열사는 그러나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다음 날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그는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다행히 동료 자취방으로 몸을 피한 박 열사는 친척 등의 도움으로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1982년 4월 섬유 공장에서 일하던 그를 알아 본 동료 노동자의 신고로 체포됐다.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박 열사는 "5·18 진상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투쟁 동안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고, 그는 급성심근경색 등 증세를 보이며 1982년 10월12일 숨을 거뒀다.
당시 보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장 교육감은 박 열사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조문객들을 맞아 분향을 인도하던 장 교육감은 박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들과 대치하다 2박3일 간 유치장에 갇혔다.
친구의 투쟁과 죽음을 지켜본 장 교육감은 큰 상실감과 죄책감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리고 민주시민 교육으로 마음의 빚을 갚겠다 다짐했다.
"법조인이 돼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하겠다던 관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나라는 생각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독재정권 타도의 전사가 돼야겠다 되뇌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남은 생은 민주시민 교육 실현으로 빚 갚으며 살렵니다. 민주화의 북극성으로 하늘에 박힌 친구 관현이가 참으로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