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북극성이 된 관현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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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북극성이 된 관현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Ⅲ) 또다른 영웅을 기억하는 이들 ⑥(끝)박관현 열사||장석웅 도교육감과 중·고 동창생 ||노동자 실태조사, 들불야학 교사 ||전대 총학생회장 교도소서 최후 ||교육감 “부채의식 커 꼭 갚을 것”
  • 입력 : 2021. 07.06(화) 16:14
  • 양가람 기자

박관현(1953.6~1982.10.12) 열사. 광주고 제공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광주고 제공

"친구의 죽음은 제게 부채의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친구가 꿈꾸던 민주주의 참세상을 이루기 위해 민주 시민 교육에 더욱 힘을 쏟으려 합니다."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은 친구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박관현(1953.6.19~1982.10.12) 열사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고 고백했다.

장 교육감은 박관현 열사와 광주동중, 광주고 동기 동창이다. 6년 간 같은 반을 네 번이나 했다.

다소 내성적이고 얌전했던 장 교육감은 당시의 박 열사를 '영광군 불갑면 촌놈이지만 털털하고 공부도 잘했던' 학생으로 기억했다.

1978년 9월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에 복학한 장 교육감은 전남대 법대 앞에서 박 열사를 다시 만났다. 정의로운 법관을 꿈꾸며 공부에 매진하던 박 열사에게 장 교육감은 '독재 정권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이 날 이후, 박 열사가 도서관을 찾는 날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해 12월 박 열사 포함 10명이 광천동 시민아파트 앞 신협 사무실 옆방에서 숙식을 하며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 조사를 진행했다. 들불야학 강학들의 제안을 계기로 시작된 실태 조사는 두 달 넘게 진행됐다. 합숙 장소도 들불야학 학생들이 공부하던 시민 아파트 교실로 바뀌었다. 길고 고된 실태 조사는 이듬해 2월에 보고서 형태로 완성됐다. 그동안 어느 기관에서도 진행된 적 없는 최초의 작업이었다.

조사 기간 동안 쌓인 동지애로 이들은 전남대 안에 '사회조사연구회'를 창립, 본격적으로 노동 실태 조사 활동을 전개했다. 1980년 수많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배출된 전남대 최고 사회과학 서클의 탄생이었다. 창립 멤버였던 박 열사와 장 교육감은 그 즈음 '들불 야학'에서 선배인 윤상원 열사와 함께 강학 교사로도 활동했다.

19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박 열사는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5월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에서의 연설은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마음을 울렸다.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 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명연설을 마친 박 열사는 그러나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다음 날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그는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다행히 동료 자취방으로 몸을 피한 박 열사는 친척 등의 도움으로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1982년 4월 섬유 공장에서 일하던 그를 알아 본 동료 노동자의 신고로 체포됐다.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박 열사는 "5·18 진상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투쟁 동안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고, 그는 급성심근경색 등 증세를 보이며 1982년 10월12일 숨을 거뒀다.

당시 보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장 교육감은 박 열사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조문객들을 맞아 분향을 인도하던 장 교육감은 박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들과 대치하다 2박3일 간 유치장에 갇혔다.

친구의 투쟁과 죽음을 지켜본 장 교육감은 큰 상실감과 죄책감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리고 민주시민 교육으로 마음의 빚을 갚겠다 다짐했다.

"법조인이 돼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하겠다던 관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나라는 생각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독재정권 타도의 전사가 돼야겠다 되뇌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남은 생은 민주시민 교육 실현으로 빚 갚으며 살렵니다. 민주화의 북극성으로 하늘에 박힌 친구 관현이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광주고 3학년 5반 단체사진. 광주고 제공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