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2·8독립선언서 가지고 귀국한 광주부윤 정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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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2·8독립선언서 가지고 귀국한 광주부윤 정광호
화순 능주 출신 정광호 고향서 교육자로 활동||강제 해임후 도일, 일본서 항일 독립운동 앞장||2·8독립선언서 지참 귀국, 국내 배포키로 결의||19년 3월 10일, 광주천 장터서 만세운동 펼쳐||상해로 망명, 임정서 김철 등과 독립투쟁 헌신||해방후 제3대 광주부윤(시장)·제헌위원으로 활동
  • 입력 : 2021. 07.28(수) 16:57
  • 편집에디터

대한민국 3년(1921)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 촬영. 셋째줄 오른쪽에서 여덟 번째가 정광호다.

광주시청에 걸린 정광호 선생 사진

애국지사 정광호 영위(현충원)

정광호 선생 생가터비(화순)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천 큰 장터와 작은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러퍼진다. 광주 3·1운동의 출발은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던 유학생이 가져온 2·8독립선언서와 맞닿아 있다. 그 선언서를 가지고 들어와 장성에서 인쇄한 후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분이 바로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정광호다.

정광호(鄭光好, 1895~1956)는 화순군 능주면 내리에서 온양 정씨 정대교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광주로 이사한 후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보 부설 임시교원양성소에 입학한다 양성소를 졸업한 후 그는 고향에 설립된 능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지만, 「독립찬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는 등 학생들의 배일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1916년 해임된다.

능주공립보통학교에서 해임된 정광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후,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백관수, 김도연 등이 중심이 되어 2·8독립선언을 준비할 때, 그는 광주공립보통학교 동기인 최원순·김희술 등과 함께 선언문 등사, 동지 규합, 장소 물색, 국내와의 연락 등의 임무를 맡아 막후에서 헌신했다.

2·8독립선언서 인쇄를 맡았던 그는 최팔용 외 10명이 서명한 2·8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1월 말 귀국한다. 2월 2일,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광주 출신 김범수와 최정두, 장성 출신 박일구 등과 만나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키로 뜻을 모은다. 그리고 박일구의 처가인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에서 2월 5일부터 6일까지 한글로 된 독립선언서 600여 장과 일본어로 된 독립선언서 50여 장을 인쇄하였다. 서울로 올라가 최남선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알게 된 그는, 다시 광주에 내려와 한길상・최한영・강석봉 등 당시 청년 집단이었던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과 함께 치밀하게 준비하여 3월 10일 작은 장날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상하이로 망명하다

1,000여 명이 참여한 광주 3·1운동 주모자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리자, 그는 인천에서 밀항선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한다. 그는 광주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3년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에 도착한 정광호가 찾아간 곳은 임시정부였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국내외의 비밀결사 조직들과 연락을 담당하는 교통부 참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함평 출신 김철 등과 함께 전라도를 대표하는 대의원으로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대표 자격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과거문제조사위원회와 국민대표자회의 선서 및 선언문을 기초할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정광호는 상하이에서 청년회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다. 1924년 2월경에는 상해 교민단 학무위원회 대표로 김두봉과 함께 활동했으며, 그해 9월 경에는 한국유학생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25년 2월 21일에는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의 이사로, 1927년 7월경에는 안창호 등 10여 명과 함께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해 그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광주부윤, 제헌의원이 되다

해방 이후 정광호는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등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여 한민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이 된다. 그리고 1947년 6월 27일 미군정 당국의 발령에 의해 제3대 광주부윤(현 광주시장)에 부임한다. 그후 한민당의 공천을 받아 1948년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5·10 총선거에 광주에서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개원 국회에서 그는 15명의 '국회법 기초위원'으로 선정된다. 그러나 그의 국회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부 내 친일파 숙청에 관한 특별위원회'구성 및 반민특위활동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는 1948년 8월 19일 제44차 제헌의회 본회의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인 사실을 조사하고 확실한 근거를 수집해서 개별적으로 특정인을 친일파로 지정해서 숙청을 건의하자"라는 긴급동의를 하며 친일파 척결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래서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에 의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의 발언은 그가 속한 한민당의 소극적인 친일파 척결 의지와는 다른 것으로, 3·1운동 및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때의 그의 사상이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광호는 2년 뒤인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 대신 경기도 양주군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 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노동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군사위원회 합동으로 추진한 일명 '모시기 공작(군사위원회 8호 결정)'에 따라 납북되고 만다.

정광호, 그는 2·8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국한 후 광주 3·1운동에 불을 지핀 인물이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 국민대표회의 전라도 대표 등으로 활약했다. 해방 정국에서 광주시장으로, 그리고 광주를 대표하는 제헌의원이 되어 반민특위를 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한동안 잊혀졌고, 광주광역시청의 시장 사진에서도 누락되어 있었다. 1989년 3·1절을 맞아 그는 다시 명예를 되찾는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건국포장을, 1990년에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현장을 가다

정광호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은 많지 않다.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고향인 능주면 내리에는 그의 탄생지였음을 알려주는 표석만이 남아 있다. 능주면 내리는 능주향교 앞길을 넘어가면 바로 나온다. 정광호가 태어난 내리 마을 바로 앞에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있는 셈이다.

지금 화순군에는 향교가 셋 있다. 화순향교, 동복향교, 능주향교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건립된 곳이 1392년(태조 1) 건립된 능주향교다. 이는 조선 시대 화순군이 세 지역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능주가 중심지였음을 잘 보여준다. 능주는 1632년(인조 10) 인헌왕후 구씨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23부제를 실시할 때 나주부 능주군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순군에 합쳐져 능주면이 되었다.

정광호가 태어난 내리 마을은 20여 호 정도가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입구에는 정자가 있고, 가까이에 위치한 '내리경로당' 앞에 그의 탄생지 표석이 서 있다. 표석이 서 있는 그 일대가 그의 탄생지였다고 한다. '독립지사 정광호 탄생지'란 제목이 붙은 표석에는 "정광호(1895~1955)는 1919년 1얼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으며, 광주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의원과 광주부윤을 지냈다"라는 간단한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태어난 내리 마을에 남아 있는 흔적의 전부다. 그에 관해서는 마을 사람들도 잘 알지 못했다.

그의 흔적은 그가 1915년부터 1년여 근무했던 능주공립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 전설로만 남아 있다. 능주공립보통학교는 1908년 개교한 화순 최초의 근대학교였다. 능주초등학교는 1922년 독립운동가이면서 중국 혁명음악가로 널리 알려진 정율성이 1학년을 다닌 학교였으니, 두 분이 한 공간에 있었던 셈이다.

서울 현충원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 왼편 끝에는 정광호를 비롯한 김규식, 조소앙, 유동렬, 조완구, 박열, 정인보 등 1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정광호의 혼이 현충원에 있었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할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납북된 인사다. 이들의 북한에서의 행적이 『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책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납북인사들은 1953년 휴전이 이뤄지면서 서울로 환향(還鄕)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환향론자와 이승만 정권의 신변 불보장으로 인한 비환향론자로 나뉘었는데, 정광호는 백관수 등과 함께 환향론자였다. 그는 비환향론자들을 비판하였고, 북한 당국의 요청에 의해 1956년 7월 "남북 총선거에 따라서 통일민주엽합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의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되었지만, 결성식에 불참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돌아오고 싶던 고향이 아닌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애국지사 정광호 영위'라 쓰인 위패가 더 가슴시린 이유다.

정광호, 그는 해방 직후 제3대 광주부윤(현 광주광역시장, 1947.8~1948.5)을 지낸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주광역시청에서 마저 잊힌 인물이었다. 시청 중회의실에는 역대 광주시장의 사진이 부착되어 있는데, 그의 사진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2019년,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그가 재조명되면서 2020년 3월 4일, 시청 중회의실 역대 광주시장 사진 게시판에 정광호의 초상화를 걸었다. 변변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