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한센인이 그로톡 갖고 싶었고 恨 서린 오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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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한센인이 그로톡 갖고 싶었고 恨 서린 오마도
고흥 오마마을||5·16 직후 오마도 간척 시작||첫 삽 26년만인 1988년 완공||'소록도 멋어난다' 말 믿고||한센인들 죽도록 일했건만||인근 주민들 반대로 쫓겨나||아픈 역사 담은 '추모 공원'
  • 입력 : 2021. 07.29(목) 14:57
  • 편집에디터

한센인 추모 조형물. 당시 한센인들의 고된 노동을 표현하고 있다. 이돈삼

다섯 마리의 말 조형물. 간척으로 하나 된 5개 마을을 가리킨다. 이돈삼

농지를 개간하면, 그 농지를 주겠다고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면 어떨까? 정확히 표현해서, 간척을 하면 그곳에 집을 짓고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해놓고 지키지 않았다면….그것도 개인이 아닌 국가기관이 그랬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얘기다. 한센인들은 간척을 하면 소록도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2년 동안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땅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났다. 한센인들의 한(恨)으로 남았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덕면 오마리에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이 있다. 소록도에서 약 12㎞ 떨어진 곳이다. 한센인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오마도 간척지와 소록도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추모공원은 오마도 간척사업에 투입된 한센인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당시 한센인들의 고된 노동을 표현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물 위에서 경사진 땅을 파고, 등짐을 나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간척사업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을 보여주는 테마관과 추모단, 전망대도 꾸며져 있다.

5마리의 말 형상도 있다. 각기 다른 쪽을 향한 말은 간척으로 하나 된 5개 마을을 가리킨다. 한센인 추모공원은 고흥군이 2012년 6월 완공했다. 면적이 2만㎡에 이른다.

오마도 간척은 5·16군사쿠테타 직후 시작됐다. 1961년 8월 군의관 출신 육군대령 조창원이 소록도병원장으로 오면서다. 그는 한센인들의 사회복귀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한다.

먼저 한센인 축구팀을 꾸렸다. 섬 밖에서 코치를 불러 훈련을 시켰다. 개신교와 천주교 팀으로 나눠 날마다 시합을 시켰다. 한센인들의 신앙심을 자극한 것이다. 축구 실력이 갈수록 늘었다. 그 결과 전국체전에 전남 대표로 출전했다. 조 원장은 물론, 한센인도 고무됐다.

오마도 간척은 그 연장선상에서 추진됐다. 조 원장은 고흥의 5개 섬을 연결하는 간척지를 그렸다. 바닷물이 빠지면 뭍과 연결되고, 바닷물이 들면 섬으로 바뀌는 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이 대상이었다. 5개의 섬을 이은 모양새가 말(馬)을 닮았다고 '오마도(五馬島)'라 불리는 곳이었다.

조 원장은 이 섬들을 이어 방조제를 막고, 그 바다를 메워서 만들어지는 농지 992만㎡를 한센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록도의 2배가 되는 땅이었다. 한센인들은 내 땅을 갖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조 원장은 1962년 6월 정부로부터 사업 인가를 받았다. 오마도개척단을 창설하고 그해 7월 방조제를 쌓는 공사에 들어갔다. 방조제 축조는 삽과 곡괭이, 손수레를 이용해 제방을 쌓아 바다를 메우는 공사였다. 지금처럼 중장비가 넘쳐나는 시대도 아니었다.

방조제는 풍양면에서 오동도까지 385m, 오동도에서 오마도 남쪽까지 338m, 그리고 오마도에서 도양읍 봉암반도까지 1560m의 바다를 가로질렀다.

온전하지 못한 육신을 지닌 한센인들은 내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바다를 메우는 작업에 참여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도 깊어 언제 마무리될지 모를 공사였다. 희망, 하나로 견뎠다.

한센인들은 현장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공사에 투입됐다. 점심을 먹고 나면 또 흙을 파내고 바위를 옮겨 바다에다 붓는 일을 날마다 거듭했다. 인근 뒷산과 무인도를 모두 헐고, 거기서 얻은 흙과 바위를 바다에다 밀어 넣었다. 끝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백 일이 지났다. 고흥반도로 이어지는 바다가 흙과 바위로 메워지는가 싶었다. 거센 바람이 몰고 온 파도가 한순간에 휩쓸어 버렸다. 메워진 흙과 바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한센인들은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 짓뭉개진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내 땅을 갖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한센인들이 하루하루를 참고 견디며 일을 한 원동력이었다.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한센인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한센인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뿌리 깊은 불신 탓이었다. 한센인들에게 땅을 내주면 안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거셌다.

때마침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가세했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내 땅이 생긴다는 한센인들의 희망이 한순간 물거품으로 변했다. 소록도 밖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산산조각 났다.

그때까지 간척사업은 절반 이상 진척됐다. 한센인들은 공정의 80%, 당국은 60%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율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한센인들은 간척사업을 하고도 그 땅에서 밀려났다. 육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세상에서 외면을 당했는데, 또 다시 고통과 차별, 모멸감을 느끼며 돌아서야 했다.

간척 사업권이 보사부에서 전라남도로 넘어갔다. 한센인들이 바다를 메우겠다며, 방조제 쌓기에 나선 지 3년 만이었다. 방조제 축조는 전라남도가 마무리했다. 간척지 조성은 고흥군에서 1988년 완공했다. 방조제를 막아 간척지를 만들자고 첫 삽을 뜬지 무려 26년 만이었다.

오마도 간척지에서는 지금 한센인 아닌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 정부의 대한센인, 대국민 사기극이 되고 말았다. 한센인들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책이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이다. 오마도 간척에 나선 한센인들의 얘기를 담고 있다.

오마리는 이 간척지를 두고 형성됐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농경지에서, 오래 전 바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은 오마, 신흥, 분매, 은전 등 4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분매'는 옛날에 물이 없어 '불모도'라 부르다가 '불무섬'으로 바뀌었다. '신흥'은 간척 전 '고발도', '괴발섬'이었다. '묘도'로도 불렸다. 고양이를 닮은 섬이다.

간척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 때 뭍과 연결됐다. 바닷물이 가득 차면 섬으로 바뀌었다. 간척을 통해 새로 육지가 됐다. 마을 형성 배경도 서로 같다. 법정리도 하나로 이뤄져 있다. 간척으로 만들어진 오마평야에서 농사도 함께 짓고 있다. 생활권이 같은 만큼, 결속력도 강하다.

코로나19의 기세가 꺾일 줄을 모른다. 휴가철이지만, 맘 놓고 휴가를 즐길 수도 없다.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 들러 한센인들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코로나 시대에 맞는 휴가법이다.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서 소록도(小鹿島)도 멀지 않다. 검시실과 감금실, 한센병박물관 등이 있다. 한센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깨끗한 자연환경으로 우리에게 쉼을 주는 섬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한센인 추모 조형물. 간척으로 형성된 오마리와 간척지를 배경으로 들어서 있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