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바이러스가 퍼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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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갑질 바이러스가 퍼지는 사회
양가람 사회부 기자
  • 입력 : 2021. 08.01(일) 14:03
  • 양가람 기자
양가람 사회부 기자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투사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로마의 부유한 자유민인 에파프로디토스 밑에서 노예로 살면서 모진 학대를 받았다. 사실 에파프로디토스 역시 네로 황제로부터 해방된 노예였다. 주인이 자신의 다리를 부러트렸을 때, 에픽테토스는 깨달았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전가된다는 것을.

2021년 대한민국에도 상처를 가진 이들이 많다. 수없이 다치고 무너져도 꿋꿋이 '버텼던' 이들은 현재를 '버티는' 이들에게 본인들의 상처를 전가한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도 아물지 못하고 덧나는 이유다.

상처가 곪아가는 데도 아픔에 둔감해지는 이들도 늘고 있다. 아니, 아프지 않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는 것이다. "처음엔 그게 직장내괴롭힘인 줄 몰랐어요. 저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상사에게 계속 업무보고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재계약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꾹 참았죠. 문제 삼는 순간, 제 밥줄이 끊길 수도 있으니까요." 상사로부터 지속적인 갑질을 당하던 한 여성은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어야 했다.

한 움큼의 약들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녀가 직장내괴롭힘을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직장내괴롭힘을 '인정받고 해결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동안 갑질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퍼졌고, 감염된 이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그 질병'을 받아들였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라는 체념을 읊조리지지만, 아무도 말한 적이 없기에 바뀌지 않았다.

직장내괴롭힘 금지법이 제정된 지 2년이 지났다. 한 대형병원 직원들의 장기자랑 영상이 온라인 상에 퍼지면서 설움을 당했던 이들의 '직장갑질 미투'가 시작됐다. 이후 숱한 난항 끝에 한국은 동양 최초로 직장내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한 국가가 됐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도 갑질 피해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 광주시 역시 '갑질행위 근절 및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하고 매년 예방교육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접수된 갑질 신고는 단 두 건으로, 그나마 취하 등 조사 과정에서 해결됐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직장내갑질은 신고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깔린 것이다.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직장내괴롭힘에 양극화, 성과주의 같은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고 봤다. 법·제도적 한계도 지적됐다. 오는 10월14일부터 개정된 '직장내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다. 가해자 처벌규정 부재가 문제로 지적된 만큼, 개정법에는 '가해자가 대표일 경우 1000만원 이하 과태료' 등 조항이 추가됐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 미적용 등 한계가 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를 야단치는 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노예도 신을 아버지로 둔 높은 혈통으로 우리의 형제다. 어찌 그 정도도 참지 못한단 말인가." 갑질 바이러스는 '다름'을 '우월함'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더욱 빠르게 침투한다. 갑질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강력한 백신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볼 줄 아는 반성과 타인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줄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