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연 전대사대부중 교사 |
11월은 단풍 말고도 수능의 계절이다. 해마다 중고등학교에서 감독교사가 학교별 강제 인원으로 차출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서서 감독하는 게 고역이다. 100분, 120분에 해당하는 시험 시간 내내 허리도 아프고 관절과 다리가 중력을 실감하는 동안 수험생의 눈치보느라, 중압감과 긴장감에 경기를 일으키거나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감독 교사들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다행히 작년부터 시험장 안에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어서 감독 교사들이 서로 눈짓으로 돌아가면서 잠시 앉아 있을 수 있어서 사정은 좀 나아졌다. 텝스나 토익 감독을 할 때에도 오히려 감독 교사가 앉아 있는게 수험생이 집중해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이니, 수능 시험장의 의자 배치는 때늦은 감이 있다.
매해 감독을 하면서 아쉬운 점은 시험이 점점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시험 감독 요령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탐구, 과학탐구 내에서도 2개의 선택교과를 순서대로 봐야 하는 - 순서를 어기면 부정행위 처리되는 - 것에 이제 겨우 익숙해졌는데 같은 시간에 보는 한국사 답안지를 탐구영역과 분리해서 걷어야 해서 한 시간에 답안지는 2번, 문제지는 4차례 수거한다. 올해부터는 국어 시험지도 공통 영역과 선택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어떤 감독관이 1교시 국어 시험 감독을 하면서 선택영역을 보는 시간을 제한하는 바람에 시험을 망쳤다는 학생의 민원도 들린다. 감독교사의 불찰도 있었겠으나, 문제는 근본적으로 메뉴얼이 복잡하다는 데 있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갈 필요가 있다. 평소 수능에 대한 바뀐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중학교 교사들은 바뀐 수능 정보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시험장에서 버려지는 버려지는 쓰레기도 만만치 않다. 한 번 사용하고 폐기하는 박스형 칸막이는 그렇다치고 해마다 선택하지 않은 영역의 시험지가 통으로 학생 개별로 배부되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문제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문제지가 그대로 버려지게 된다. 개인의 선택이 워낙 다양하고 그걸 일일이 배분하기가 쉽지 않고, 잘못 배분되었을 때의 문제가 더 크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낭비에 눈감아야 할지 답답하기도 하다.
일찍이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라고 말했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가 아닌 욕망의 존재이고, 욕망에 사로잡혀 욕망을 충족하기까지는 고통에 시달린 채 살아가다가, 욕망이 충족되자마자 만족감과 즐거움은 소멸하기 시작하며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젊은 교사 시절에 이러니 저러니 따졌던 많은 문제의식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들해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공통의 문제에 촉각을 세우던 교사들이 자신의 직에 익숙해지고 명분을 쌓아가면서 오히려 자기도 모르는 새 기득권이 되어 문제 제기를 아예 처음부터 막기도 한다. 요즘에야 벌떡 일어나서 소신 발언을 하는 교사를 보기는 어렵지만, 작은 단위에서조차 우리는 너무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교사의 권태감은 교육의 큰 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데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 바뀔 때 우리는 희망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지금, 교육의 희망이란 무엇인가? 나는 교육감 후보들이 각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기에만 연연하지 말고 교사에게 학생에게 희망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그나저나 감독 요령의 어느 페이지를 숙지해도 시험장 휴대가능 물품에 담배와 라이터는 보이지 않는데, 왜 우리는 시험장 주변에서 흡연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관대한가? 점심을 책상 위 박스 칸막이 내에서만 먹게 하고 자리 이동도 금지하면서, 점심 식사 후 삼삼오오 담뱃불을 나누고 왁자지껄하게 맞담배를 피우고 있는 수험생들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꼰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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