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마을 곳곳에 살아 숨쉬는 '충무공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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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마을 곳곳에 살아 숨쉬는 '충무공의 숨결'
여수 덕충마을||유교사당 충민사·사찰 석천사||충무공 기리는 유적지 많아||어머니 향한 효심 이어받아||어르신 모시고 '효도관광'도
  • 입력 : 2022. 04.28(목) 17:10
  • 편집에디터

이순신의 표준 영정. 충민사에 위패와 함께 모셔져 있다. 이돈삼

여수는 이순신과 엮인다. 호남이 다 그렇지만, 여수는 더욱 각별하다. 임진왜란 때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머물던 통제영이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해 온 건 1591년. 통제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601년까지 10년 가까이 설치됐다. 하여, 여수는 이순신이 전라도 백성들과 함께 왜란을 극복한 현장이 됐다. 거북선을 처음 출정시킨 곳도 여수였다.

여수가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여수였다. 때마침 이순신 탄신(4월 28일)을 맞았다. 발걸음이 여수로 향하는 이유다. 연초록으로 싱그럽던 산천이 초록으로 짙어지고 있다. 계절도 초여름으로 향한다.

여수에는 이순신 관련 유적이 많다. 의미도 다 깊다. 널리 알려진 진남관을 비롯 선소, 고소대가 먼저 꼽힌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진해루는 당시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다. 이순신은 진해루를 지휘본부로 썼다.

선소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한 곳이다. 지휘소 역할을 했던 세검정, 배를 매어 뒀던 계선주, 그리고 군기고, 대장간, 망해루가 복원돼 있다.

고소대는 이순신이 수군의 훈련을 독려하고 군령을 내린 곳이다. 이순신을 기리는 타루비(墮淚碑)가 여기에 있다. 1598년 이순신이 전사하고 5년 뒤인 1603년 부하 수군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웠다. 높이 97㎝, 폭 58.5㎝로 크지 않지만, 이순신을 기리는 최초의 비석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도 있다. 길이 305㎝, 폭 124㎝로 국내에서 가장 큰 대첩비다. 1620년 조정이 주도해 세웠다. 해남 우수영에 있는 '우수영대첩비(명량대첩비)'와 구별해 '좌수영대첩비'로도 불린다.

덕충동 풍경. 석천사 입구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돈삼

덕충동 풍경. 일반주택과 고층 건물 사이로 넓지 않은 도로가 이어진다. 이돈삼

빗길을 달려 덕충동으로 들어섰다. 여수시립 현암도서관과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가 있는 곳이다. 오래된 마을답게 일반주택과 고층 아파트가 뒤엉켜 있다. 그 사이로 넓지 않은 도로와 골목이 이어진다.

길은 도서관 앞에서 충민사, 석천사로 이어진다. 빨갛게 핀 철쭉과 영산홍이 연등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석천사와 충민사로 가는 길. 빨간 영산홍이 연등과 어우러져 있다. 이돈삼

석천사와 충민사로 가는 길. 빨간 영산홍이 연등과 어우러져 있다. 이돈삼

충민사. 전국의 수많은 이순신 사당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다. 이돈삼

충민사. 전국의 수많은 이순신 사당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다. 이돈삼

충민사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도 62년 앞선다. 1601년 어명을 받은 이항복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에 명을 내려 세웠다. 편액도 선조가 직접 썼다.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앞뜰에는 옛 사당의 주춧돌이 놓여 있고, 한쪽에 비석이 서 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을 1970년대에 다시 지었다. 지역의 유림들이 앞장서고 힘을 모았다.

충민사유물관.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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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이 배향돼 있다. 이억기는 이순신과 함께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안홍국은 안골포 해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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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유물관도 있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청동상이 맞아주는 전시관이다. <난중일기>로 통용되는 이순신의 친필 임진일기, 정유일기, 갑오일기 등이 복제본으로 전시돼 있다. 당시 사용됐던 곡나팔과 영패, 귀도, 조선장수의 갑주도 보인다. 일본군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이순신과 전라도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유물관 앞에는 임진왜란 때 쓰였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화포가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화포의 생김새와 기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석천사 대웅전과 의승당. 이순신을 기리는 절집이다. 이돈삼

석천사 대웅전과 의승당. 이순신을 기리는 절집이다. 이돈삼

이순신과 조선수군 조형물. 충민사유물관에서 만난다. 이돈삼

충민사 바로 옆에는 절집 석천사가 있다. 1599년 자운스님과 옥형스님이 이순신의 충절을 기리려고 지었다. 자운은 승려 300명으로 이뤄진 당시 의승수군의 대장이었다. 옥형은 군량미 조달에 앞장섰다. 절집의 의승당 기둥에 이순신과 자운·옥형, 의승군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불교의 절집이 한데 어우러진 사연도 애틋하다. 충민사는 당시 의병에 참여했던 향교 교리 박대복에서 비롯됐다. 박대복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7년 동안 종군했다.

그는 이순신이 물을 마시러 오가던 곳에 작은 사당을 지었다. 지금의 충민사 뒤쪽이다. 나중에 옥형이 충민사 옆에 작은 정사를 지었다. 옥형은 죽는 그 날까지 정사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호남의 많은 승려들은 절집에서 이순신 추모재를 올렸다. 자운스님은 1599년 노량에서 수륙재를 지냈다. 수륙재는 나라의 큰 행사였다.

덕충동 풍경. 충민사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돈삼

덕충동 풍경. 충민사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돈삼

충민사와 석천사에서 덕충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덕충동은 마래산 아래 둔덕으로 인해 '떡더굴' '덕대'로 불렸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덕대'와 '와동'이 합해지고, 충민사의 '충'을 가져다 써 덕충리가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덕충천을 사이에 두고 덕대, 석동으로 나뉘었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덕대, 돌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고 기왓장을 굽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석동이다. 덕대의 '덕', 충무공 이순신의 '충'자를 가져다 붙여 덕충동이 됐다.

덕충동은 충무공 이순신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마을이다. 주민들의 자긍심도 높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향한 효도에 극진했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효사랑 한마음 잔치를 열어왔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효도관광도 다녔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까지 그랬다.

오후 늦게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주민들이 한두 명씩 나와 충민사 앞길을 오가며 걷기운동을 한다. 이제 그만 코로나19를 떨치고, 주민들이 같이 웃고 즐기는 마당이 다시 펼쳐지면 좋겠다.

충민사유물관.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돈삼

화포 조형물. 충민사유물관 앞에 설치돼 있다. 이돈삼

석천사와 충민사로 가는 길. 빨간 영산홍이 연등과 어우러져 있다. 이돈삼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