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며 찍었던 사진, 후대와 나누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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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목숨 걸며 찍었던 사진, 후대와 나누고 싶었죠"
●5·18 42주년 특집-기록을 넘어 시대를 넘어|| 조상기 前광주기독병원 의사 ||당시 기독병원 레지던트 1년차 ||“월급 모아 산 사진기 역사 담아 ||두려움에 42년 동안 인화 못해” ||“시민들이 만든 값진 민주주의”
  • 입력 : 2022. 05.17(화) 17:39
  • 정성현 기자

조상기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기독병원 내과의. 정성현 기자

"그날 실려온 환자를 보고, 군인이 이랬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국군의 총구가 국민을 향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기독병원에서 레지던트 내과의로 근무했던 조상기(67·모든내과 원장) 씨는 42년 전 그날을 사진으로 남긴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시민들을 치료함과 동시에, 광주항쟁 현장 곳곳을 다니며 참혹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목숨을 걸고 사진 찍을 이유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조 원장은 "잊혀질 수 있던 찰나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와 공유하고 싶었다"고 담담히 전했다.

●'총을 쏜 군인…믿기지 않았던 그날'

1980년 5월18일, 광주기독병원에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다친 시민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그 탓에 부상자들이 누워있을 병상조차 없어, 병원 복도에서 진료를 하기도 했다.

쇄골이 양쪽으로 접힌 사람, 풍선처럼 얼굴이 퉁퉁 부은 사람 등 온몸이 피투성이로 뒤덮인 시민들이 줄줄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들은 전부 길을 지나다니다 군인에게 붙잡혀 아무 이유 없이 곤봉·개머리판 등으로 두들겨 맞은 광주 시민들이었다.

조 원장은 "'군인한테 맞았다'는 말이 처음에는 헛소리인 줄 알았다. '도대체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군인에게 맞았다는 말을 할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상자가 늘어갔고, 주변 지인과 친척들 중에도 피해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번뜩 '이거 진짜 큰일이구나'하며 상황을 제대로 인지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5월21일 금남로에 나온 조 원장은, 최루가스가 자욱하고 하늘에는 헬기가 떠다니는 공포스러운 순간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사진'이었다. 앞서 1979년 인턴 생활 동안 모은 월급으로 카메라 한 대를 구매했던 터다. 그렇게 그는 참상의 현장을 담기 위해 쉬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그날의 기억을 더듬던 조 원장은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금남로2가의 이름 모를 회사원'이라고 칭한 그를, "5·18 당시 시민들의 열망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조 원장에 따르면, 그 회사원은 총소리가 무서워 밖을 나오지 못했던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러나 잠깐 점심을 사러 외출을 하던 중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시민을 발견했다. 회사원은 곧바로 그를 업고 적십자병원으로 뛰어갔다.

조 원장은 "그에게 들은 바로는, 안이고 밖이고 (병원) 사방이 난리였다고 하더라. 정신이 없다 보니 병원 관계자들도 그를 보고 '저기 가서 혈액 가져와라' 하면서 일을 시켰다"며 "그렇게 광주시민을 돕던 평범한 그는 27일 마지막 날까지 도청을 지켰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한참이 흐른 지금도 그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80년 5월22일 "도청으로 2시까지"라고 적힌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민군 모습. 조상기 제공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민주주의'

조 원장이 목숨을 걸고 찍었던 사진을 세상에 내놓은 건, 그로부터 42년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항쟁이 담긴 필름'은 집 서재 책장 밑에 꽁꽁 숨겨졌다. 그가 곧장 인화 하지 못했던 이유는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5·18'과 관련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죠. 80년대 때는 비슷한 말만 해도 끌려가, 폐인이 돼 나왔으니까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필름을 버리려고도 했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네요."

이렇게 꽤 오랫동안 책 사이에 놓여있던 필름은, 조씨가 정년퇴직을 앞두고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가 남아있었지만, 그는 보고 겪었던 것들을 뒤로한 채 더 이상 인화를 미룰 수 없었다.

조 원장은 "퇴직을 앞두고 보니, 기독병원에 5·18 당시 있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더라. 아픈 역사가 있었던 곳인데…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사실 내가 갖고 있어도 의미가 없지 않나. 이제 필름을 꺼내도 되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고 설명했다.

조 원장은 필름을 광주기독병원에 기증했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 '이 필름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고 사양했고, 이윽고 5·18기록관에 재기증됐다.

그는 '80년 오월 광주'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가 '단단한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평범한 시민들이 만든 '5·18'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민족 투사'가 아닌,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 있었기에 지난 시간 무수한 왜곡들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기억해 내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 조 원장이 기증한 5·18 민주화운동 사진들은 오는 7월26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복합 6관 '그들이 남긴 메시지-억압 속에 눌린 셔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1980년 5월22일 버스를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이동하는 시민군 모습. 조상기 제공

정성현 기자 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