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김홍길> 오월공동체, 죽음과 절망 속에 일어선 희망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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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열며·김홍길> 오월공동체, 죽음과 절망 속에 일어선 희망의 언어
김홍길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학예연구사
  • 입력 : 2022. 05.18(수) 13:31
  • 편집에디터
김홍길 학예연구사
다시 찾아온 오월이다. 광주의 오월은 특별하다. 어떤 이들은 5월이 되면 몸이 아프다 하고, 어떤 이들은 5월을 어찌 보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한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에 시달리기도 하고,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애절한 슬픔에 잠겨들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뒤엉켜 우러나는 '기억의 통증', 일명 '오월통'이다. 광주시민들은 365일을 그렇게 오월에 살고 있다.

1980년에 대한 첫 기억은 마을 장례식의 기억이다. 그해 봄날 마을에 초상이 났다. 마을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여 상가를 찾았고, 마당에 '덕석'을 깔고 고인을 추모하고 상주를 위로했다. 장례식 마지막날, 꽃상여가 동네를 한바퀴 돌더니 만장을 앞세우며 동네 밖으로 먼 길을 돌아 움직였다. 어린 눈에 비친 당시는 마을전체가 하나의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광주에 '큰일'이 났다. 사람이 엄청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스승의 날이 지난 뒤 광주에 간 담임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없는 흐릿한 봄날 교실의 기억은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았다. 왜 담임선생님은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마치 검은 장막으로 빛을 차단당한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종종 어릴 적 보았던 장례풍경은 오월항쟁의 모습과 오버랩되곤 했다. 일종의 상실의 역사였고, 다시 보기 어려운 대동세상이었다. 5・18 직후 잔혹한 계엄군의 폭력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불과 이틀만에 수십만명의 군중이 돼 대항쟁을 전개했다. 계엄군에 맞고 쓰러진 이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들고, 헌혈과 구호를 통해 한명이라도 살리고자 몸부림 친 시민 모두가 오월의 주역이다. 시·도민뿐만 아니라 광주에 있던 외국선교사나 미 평화봉사단원, 외신기자들도 위급한 광주상황을 알리고자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쓰러진 이들을 구호고자 달려들었다. 5월 20일과 5월 21일 밤을 지새며 민주회복을 위해 처절하게 항쟁하던 시민들은 계엄군이 물러난 21일 오후 도청에서 금남로를 청소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옛전남도청앞 분수대에 모여 오월공동체를 구현했다. 그것은 오래된 미래였다. 일본의 어떤 이는 오직 '광주만이 빛나고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5월 27일 광주외곽으로 퇴각했던 계엄군은 7일 만에 더욱 흉포해져서 돌아왔고, 전남도청을 지키던 최후의 항전자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짓밟았다. 그것은 삶과 죽음으로 가를 수 없는 어떤 의미로 남았다.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항전의 새벽을 지켰던 이들의 숭고한 헌신과 의기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위대한 역사였다.

5・18이후 광주에서 살면서 많은 울분과 슬픔을 보았다. 가슴에 피멍이 새겨진 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시민들은 오월의 한(恨)으로부터 좀처럼 헤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슬프고 암울한 세월이었다. 학살주범이 청와대 권력을 차지한 믿기 힘든 현실 앞에 절망하고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저녁 9시 뉴스에 등장하는 '학살자 전두환'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후려치고, 수없이 대못질을 했다.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던 시민들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일부 항쟁참여자들은 긴 좌절 끝에 육체와 정신적인 고통을 겼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폭도로 매도당한 광주시민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5・18기억을 되살리고자 몸부림쳤다. 어떤 이는 기록을 남기고, 누군가는 증언하고, 동지를 규합해 기록과 진실을 알렸다. 진실을 알리고자 김의기 열사, 김태훈 열사, 홍기일 열사 등 수많은 이들이 오월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슬프고 비극적인 헌신이었다. 문화예술을 통해 진실을 알려려는 활동도 이어졌다. 1987년 무렵 옛 광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목격한 오월사진전은 상처를 사로잡았다. 피만 봐도 무서웠고, 꿈에 볼까 두려웠지만 '꽃잎처럼 금남로에 쓰러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되는 '오월의노래'를 들을 때면 터미널옆 계단에 있던 그 슬픈 표정을 잊을 수 없다. 80년 당시 살육 현장의 진실을 알렸던 외신기자들의 영상은 '광주비디오' 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5・18은 진실을 알리기 위한 실천과 공감, 따뜻한 연대의 기억을 통해 되살아났다.

광주시민들은 오월항쟁의 기억을 되살려 스스로 희망을 찾고자 했다. 그것은 시민들이 만든 열흘간의 대동세상, 광주공동체 기적의 재발견이었다. 항쟁기간에 시민들이 대동단결 해 불의한 국가폭력을 규탄하고 민주회복을 외쳤듯, 살아남은 이들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통스런 날들이 상처를 쓰다듬고 공명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승화되었다. 망월동 민족민주열사의 묘지가 오월영령들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연대의 과정이었다.

오늘날 광주는 순례자들이 깃드는 도시가됐다. 항쟁의 공간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기억저장소가 되었고, 5・18 사적지들은 광주를 찾는 참배객들을 맞고 있다. 국립 5・18민주묘역뿐만 5・18민주광장과 금남로 일대의 5・18기록관이나 전일빌딩을 비롯해 옛 광주공용버스터미널 등을 찾는 이들에 의해 순례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국가폭력으로 국민이 희생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고 있다.

5・18 한복판에서 어느 곳에도 학살자를 두둔하는 정의는 없었다. 정의가 무참하게 짓밟힌 금남로와 도청분수대에서 민주주의가 되살아났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고 솟구친 보리싹처럼 절망의 끝에서 시민들은 새 희망을 피워 올렸다. 누누이 겹친 '오월통'을 견디면서 일구어낸 오월공동체는 굴종을 거부하고 일어선 위대한 시민들의 온전한 힘으로 이룬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살자를 두둔하는 비겁자의 언어가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월의 역사가 남긴 역사적 교훈을 통해 어떻게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밝힐 것인지 오월영령 앞에서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