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 잊지 못할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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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 잊지 못할 그날
‘오월여성제’ 가두방송자 박영순 ||참혹한 광주모습 생생하게 증언 ||“그날 잊으려 했지만 용기 냈다”|| “민주주의 그냥 얻어진게 아니다”
  • 입력 : 2022. 05.18(수) 16:47
  • 강주비 인턴기자

18일 오전 5·18 가두방송 생존자 박영순씨가 광주여성가족재단 은새암에서 증언을 하고 있다. 강주비 인턴기자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살의 박영순 씨는 유아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자 전남여고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는 강사였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가야금 강의를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그는 학생들을 학교로 불렀다.

"선생님 오늘 차가 끊긴대요. 집에 일찍 가야 할 것 같아요."

학생들의 말에 박씨는 일찍 수업을 마치고, 혼자 학교에 남아 가야금을 손질했다. 오후 2시께 가야금 손질을 마친 그는 집에 가기 위해 금남로 거리로 향했다.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빗발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남학생이 다리에 총을 맞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박씨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순간 얼어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뒤 전남도청에서 시민들의 비명 같은 함성이 들렸고,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집단 사격이 이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씨는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박씨 앞에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학생!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우리가 방송해서 시민들에게 알려야 해!"

박씨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트럭 위에 올라섰다.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박씨는 전남도청 근처에서 세 시간을 내리 소리쳤다. 방송을 듣고 나온 광주 시민 수만 명이 금남로를 에워쌌다. 1980년 5월 21일, 박씨의 첫 가두방송은 그렇게 거리에 울려 퍼졌다.

18일 오전 10시 광주여성가족재단 은새암에서 열린 '오월여성제'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던 박씨(63)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박씨는 참혹했던 광주의 그날을 회상하며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풀어냈다.

박씨의 가두방송은 6일 동안 지속됐다. 오전 9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방송하며 오로지 시민들이 차에 넣어준 물, 계란, 빵 등으로 버텼다.

같이 거리를 누비던 가두방송 차들은 선두에 섰던 전옥주 씨가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자 점차 모습을 감췄다. 박씨는 마지막 방송을 다짐하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늦은 밤까지 시민 참여를 독려했다.

방송이 끝난 후 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한 박씨는 어린 여학생 한 명을 만났다.

여학생은 오빠를 찾으러 왔다 도청을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언니, 새벽에 계엄군이 여기로 쳐들어온대요. 저 좀 집에 데려다주면 안돼요?" 여학생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러나 트럭은 순찰을 위해 이미 도청을 떠나 있었다.

박씨는 여학생과 도청에 남아있기를 결심했다.

"내일 아침에 꼭 데려다줄게."

박씨는 여학생과 방송실에 숨어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곧 계엄군이 도청을 둘러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청항쟁지도부 총위원장이었던 김종배 씨가 찾아와 박씨에게 마지막 방송을 부탁했다. 박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방송을 켰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울부짖는 여성의 목소리가 15분간 광주 시내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방송이 끝나자 도청의 모든 불이 꺼졌고,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이어졌다. 방송실 앞에 총을 들고 선 계엄군에게 박씨는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여기 어린 여학생이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계엄군은 '기어 나오라'고 명령했다. 여학생의 손을 잡고 엎드린 채 기어 나온 박씨에게 계엄군은 군홧발을 휘둘렀다. 머리를 수차례 가격당한 박씨는 정신을 잃었다.

이후는 구타와 고문의 연속이었다. 박씨는 계엄법 위반, 내란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6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이미 외부에서 5·18은 '폭도'라고 규명돼 있었다. 가야금을 가르쳤던 학생, 친한 친구 모두 박씨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수십 년을 혼자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다.

18일 오전 열린 오월여성제 행사에서 한 시민이 박영순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강주비 인턴기자

박씨는 그날을 지우기 위해 타지로 거주지를 옮겨 '박수현'이라는 가명으로 살다, 2015년 6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날처럼 마이크를 잡고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박씨는 증언을 마치고 "우리가 진실을 밝혀내길 포기했다면 '광주사태'로 끝났을 5·18이 '민중항쟁'으로 남을 수 있어 기쁘다. 오늘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전국의 여성활동가 30여 명이 참석해 5·18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위로를 나눴다.

강주비 인턴기자 jubi.ka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