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장> "오랜 세월 변치않는 귀금속공예 매력 알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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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명인·명장> "오랜 세월 변치않는 귀금속공예 매력 알릴 것"
‘충장로의 보물’ 동구의 명인·명장을 찾아서||⑪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 소아마비 장애 딛고 기술자 길로 ||전국 귀금속상 다니며 사회 경험 ||‘5·18’ 등 시대정신 담아 작품활동 ||광주시 첫 금속공예 명장에 선정 ||장애인 위한 직업 훈련·복지 기여
  • 입력 : 2022. 06.22(수) 18:03
  • 곽지혜 기자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은 "기계화되고 획일화되는 사회에서 개성을 살린 공예품들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만큼 변하지 않는 귀금속공예의 매력을 더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모든 것이 바뀌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는 가치와 모양새로 우리 삶을 즐겁게 해주는 것.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은 귀금속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귀금속 공예인으로 인정받기까지 다리 한쪽이 불편한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어떤 방해도 되지 못했다. 열여덟이 되던 해 가을, 처음 망치를 잡은 후 58년간 한결같은 열정으로 작품을 만들고 제자들을 양성해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망치이고, 귀금속공예는 나의 또 다른 생명"이라고 말하는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광주 동구 충장로5가의 빛고을귀금속공예학원에서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

● 소아마비 장애인, 귀금속 공예인으로

"저도 태어나서 걸음마를 떼고는 3살 때까지 막 뛰어다니던 사람이에요."

어린 시절 6·25를 겪으며 걸린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았다. 처음에는 왼쪽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해 혼자 걷지 못했지만, 고 명장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절대 목발을 주지 않았다.

고 명장은 "어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며 목발 대신 사람을 붙여 등하교를 시켰다. 처음에는 업혀서 가고, 하굣길에는 도와주시는 분 손을 잡고 한 발자국씩 걷는 연습을 하면서 절뚝절뚝 걸을 수 있게 됐다"고 회상했다.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는 서너 차례 쉬어가며 걸어야 했던 등하굣길이었다. 어느새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늘자 고 명장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고 명장은 "더 멀리 이사를 가버리니, 다시 학교까지 가는 길에 두세 번은 쉬었다가 걸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걸으니 졸업할 때는 그 거리도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됐다"며 "아마 어머니가 그때부터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지 않았나 싶다.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어떻게든 혼자서 헤쳐 나가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가 되고 싶어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당시 의대에서는 장애인을 입학시켜주지 않았다. 그림을 그려볼까 했더니 예술은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고 명장은 그때 어머니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제약 속에서도 절대 포기 하지 않고 삶을 살아내리라 마음먹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 공부를 마칠 수 없었던 이들에게도, 고 명장처럼 장애를 가져 제약이 많았던 이들에게도 돌파구는 있었다.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고 명장은 "처음에는 시계 수리하는 기술을 배워볼까 했는데 그건 톱니를 하나하나 깎아 맞추는 것이 그야말로 공업으로 보였다"며 "그러나 어느 날 반지 만드는 것을 보는데, 이건 기술이면서도 예술이었다. 그때부터 귀금속공예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떠올렸다.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꼽은 공예품인 '5월 그날이 다시오면' 화병을 소개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겪으며 본격 작품활동

1964년, 당시 서울의 미도파백화점에서 고영석 명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귀금속공예에 입문했다. 지금처럼 학교 교육과정이나 학원에서 배우는 기술이 아닌 현장에서 배우는 기술은 날것 그 자체였다.

고 명장은 "하기 싫고 힘들고 그런 말은 못 한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배우는 것"이라며 "그렇게 5년 정도 기술을 배워서 수련생이 아닌 기술자 소리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장애 때문에 군대는 가지 않아도 됐지만,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는 군대 대신 공구가방 하나 들고 무전여행을 떠났다.

고 명장은 "기차를 타고 제일 먼저 내린 곳이 천안이었다. 도시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를 가면 다 금방이 있는데, 기술을 갖고 있으니까 바로 일을 할 수 있었다"며 "그렇게 충청도부터 경상도, 전라도까지 제주도 빼고는 안 다닌 곳이 없이 2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그 시간 동안 정말 사회 공부도 많이 하고 기술적으로도 성장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전국을 돌며 기술을 연마한 고 명장은 스물일곱 무렵 순천에서 첫 공방을 인수했다. 이듬해 충장로 5가에 새로 공방을 차리고 광주에서 2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광주는 그에게 기술자가 아닌 작가로서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곳이다.

그는 "그때는 기술을 배우고 싶은 청년들이 공방에서 먹고, 자고, 일을 배울 때라 당시에 직원들을 10여명 데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시내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며 "당장 직원들한테 일주일 휴가를 주고 일을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이 1980년 5월17일이었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외부로 나가는 모든 교통망이 막히고 집에 있는지, 고향에 찾아갔는지 모를 직원들을 찾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목격한 참상은 그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다.

고 명장은 "그전에는 어떻게 하면 예쁘게 만들어서 많이 팔까, 그래서 우리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까 하는 생각으로 제품을 만들었다면, 5·18을 겪으면서 이 사실을 남기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됐다"며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작품으로 남기는 것인데 그때 만든 것이 '5월 그날이 다시오면'이라는 화병이다"고 설명했다.

1980년부터 2년이 걸려 진실의 역사를 증언하기 위한 작품을 완성했다. 납작한 모양의 화병 밑 부분은 군화에 짓밟힌 민중들의 모습을, 길쭉한 주둥이는 그날의 함성을 표현했다.

그는 "총을 맞아 군데군데 뚫린 화병 구멍들의 색이 다른 것은 그 사이로 피 흘렸던 시민들과 그곳에서 또 다른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며 "당시에는 그 작품을 내놓지도 못하고 수십년이 지나 지난 고희전 때야 전시를 했다. 광주에서 5·18을 겪지 않았으면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고 밝혔다.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느낀 참상을 녹여낸 작품, 고경주 귀금속공예 명장의 '5월 그날이 다시오면'.

● 후학 양성·장애인 복지에 열정

1979년에는 지방에서 최초로 광주귀금속보석기술협회를 만들어 낙후된 업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장애인들을 보면서는 청년 장애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은 마음에 장애인재능개발협회도 만들었다.

고 명장은 "내가 장애인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공방에 기술을 배우러 오면 처음에는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러다가 이제 조금씩 기술을 배워가는데 그렇지 않아도 습득도 느리고 신체적으로도 불편한 장애인들이 좀 더 빨리 기술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애인재능개발협회를 계기로 1987년부터는 광주 장애인기능개발교육원을 사비로 운영하면서 장애인들의 기술교육과 취업알선에 열정을 쏟았다. 1989년에는 광주 장애인단체총연합회를 만들어 장애인 복지의 시금석을 마련했다.

2005년에는 동신대학교 귀금속디자인세공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며 '귀금속공예 기초실습' 등 교재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난 2013년 광주시 1호 공예명장으로 선정된 후에는 더욱 작품활동에 매진해왔다.

고 명장은 "그동안 참 많다면 많은 활동을 해왔는데, 이제는 문하생들 몇명 두고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며 "공예 중에서도 어려운 기술에 속하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신소재, 신산업이 대두되면서 배우려는 사람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점점 더 기계화되고 획일화되는 사회에서 개성을 살린 공예품들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만큼 그 매력을 더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고경주 명장에게 귀금속은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 속에서 수천년이 흘러도 보존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그는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만들면 결혼하면서 부인한테 주고, 늙어서 며느리한테 주고, 그게 또 내려가고 이렇게 대대로 내려간다. 그렇게 후대로 계속해서 전할 수 있는 작품,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며 "지난 2017년에 고희전을 열고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바라는게 있다면 5년 뒤 팔순전까지 열 수 있도록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광주 동구 충장로5가의 빛고을귀금속공예학원에서 교육생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

곽지혜 기자 jihye.kwa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