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망망대해 항해에서 멀고 가까운 섬들이 등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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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망망대해 항해에서 멀고 가까운 섬들이 등대 역할
고려뱃길과 토수양(土水洋)||유월 중순경 바다는 깊고 아득||새벽부터 목욕재계하고 승선||배에서 먹고 자고 사흘 밤낮||도서(島嶼)의 높고 낮음과||멀고 가까운 바를 두고 물길을||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항해법
  • 입력 : 2022. 07.07(목) 15:00
  • 편집에디터

2022. 6. 20_22. 통신사선 탐사, 홍도의 해무 -이윤선

유월 중순을 넘긴 바다는 깊고 아득했다. 한 치 앞을 열어주지 않는 시계(視界)였다. 틈새로 간혹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난 6월 20일부터 3일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복원통신사선이 공식적인 첫 탐사(단장 진호신 연구관)에 나선 길이다. 항구에 접안 하기는 했지만 묘박(錨泊)에 준한 일정이었다. 배에서 먹고 자고 사흘 밤낮을 보냈다. 시험탐사 때도 합류하여 본 지면에 감상을 남긴 바 있다(2022. 1. 14). 새벽부터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곧게 한 후에야 승선할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배를 타는 사람들의 심리가 그러하다. 제사장이 큰 제사를 지낼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스치는 바람 한 조각, 지나는 날짐승 하나에도 일진과 기후의 조짐을 예측하고 대비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임에도 이 심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다와 섬이 그만큼 예측 불가한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바다는 모든 물의 모체로 천지와 같이 끝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바다의 양(量)은 천지와 마찬가지로 측량할 수 없다." 먼바다에 나가 해류와 조류의 들고남을 주목해보면 안다. 서긍의 이 묘사가 결코 문학적 수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서긍은 또 이렇게 잇는다. "대개 하늘은 물을 감싸고 물은 땅을 받드는데, 근원이 되는 기운은 하늘과 물 사이를 오르내린다. 땅은 물의 힘을 타서 스스로 지탱하고 또 원기와 함께 오르내린다. 땅과 원기가 서로 눌렀다 올라갔다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배 안에 앉아 있는 자가 배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제 그 기운이 올라가고 땅이 가라앉는다면 바닷물은 넘쳐 올라서 밀물(潮)이 되고, 그 기운이 내려가 땅이 떠오른다면 바닷물은 줄어 내려가서 썰물(汐)이 된다." 대체로 그러하다. 망망대해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위아래와 앞뒤를 분간할 길이 없다. 오로지 천지를 생동하는 기운에 의지할 뿐이다. 흔들리는 뱃전에서 먼바다를 응시하면 보인다. 하늘땅 뭍과 물이 마치 호흡하듯 서로 부둥켜안고 가슴 벌떡이는 것을.

2022. 6. 20_22. 통신사선 탐사, 흑산도의 해무. 이윤선

심가문(沈家門)에서 협계산(夾界山)에 이르는 길

1123년 3월 14일 중국 개봉을 출발한 서긍 일행은 명주(지금의 닝보)를 거쳐 남향하다가 5월 26일 정해현 심가문(沈家門)에서 다시 출발한다. 양쯔강을 타고 내려와 고려 개경에 이르는 사단항로다. 심가문은 우리의 서남해처럼 중국에서 가장 섬이 많은 곳이다. 내가 수십 차례 드나들며 현장답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혹은 그 이전의 백제나 마한 시대에도 이 물목을 기점 삼았을 것이다. 심청이 심가문으로 팔려갔다는 전언은, 심씨가문(沈家)의 관문(門)이라는 항구 이름 때문에 나온 얘기다. 황석영도 그의 소설 <심청>에서 이런 맥락을 십분 활용한 바 있다. 힌두교와 불교를 관통하는 심청 이야기는 차차 소개해나가겠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도경에 나오는 해려초, 봉래산, 매잠, 반양초, 백수양, 황수양 등은 물빛이나 도서(島嶼)의 모양새 혹은 얽힌 역사를 두고 지은 이름들이다. 심가문을 출발하여 북동진하면 대산도라는 섬이 나온다. 이곳을 봉래산이라 했을 것이다. 불로초 찾아 동진했던 서복 일행의 출발지 중 하나다. 매잠(梅岑)은 보타원(寶陀院)이 있고 관음(觀音)이 모셔져 있다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보타도일 것이다. 저 유명한 신라초(新羅礁) 전설도 이 대목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황수양(黃水洋) 백수양(白水洋) 등은 양쯔강의 황톳물 받아 물들여진 물빛을 이르는 말이다. 실제 주산군도의 크고 작은 섬들을 다녀보면 안다. 급하게 쏟아져 내린 장강의 물들이 미처 황토흙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대해를 채운다. 백수(白水)도 쌀뜨물 색의 호명이라는 점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 크고 작은 섬들을 지나고 끝섬 승산도를 벗어나면 비로소 흑수양(黑水洋)에 이른다. 적도에서 출발한 크로시오(黑潮)에 드는 것이니, 조류에서 해류로 갈아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지금의 가거도로 비정하는 협계산에 이르도록 작은 여(礖) 하나 없는 망망대해다. 음력 6월 중이었다. 남동풍 타면 축지법 쓰듯 날았을 것이다. 북풍이라도 만나면 역주행했을 것이다. 혹여 지금의 이어초 근해를 지나며 탐라국 여인들의 노젓는소리 '이어도사나'를 듣지 않았으려나. 설화와 관념의 점유지대에 관해서는 지난 내 칼럼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이날 오후에 동북쪽으로 산 하나를 바라보았다. 성(城)에 담장이 둘러쳐진 것처럼 매우 컸는데, 햇빛 비치는 곳은 옥처럼 희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바람이 불어 배의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고려도경 백산(白山)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가 어디일까? 대개는 홍도를 백산으로 비정한다. 홍도의 북서쪽 깎아지른듯한 벼랑에 저물녘 햇살이 비치면 환하게(희게) 빛난다. 중국의 백수양(白水洋)이 쌀뜨물처럼 탁한 색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점과 견주어보자. 하지만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서로 바라볼 정도로 가깝다."라는 문구가 있어 혼란을 일으킨다. 바라볼 정도로 가까우니 대장도 아니겠나 하는 반론이 있기 때문이다. 주목한다. 기후나 거리 인식, 물상에 대한 의미부여의 편차 등을 고려해야 객관성을 얻을 수 있다. 협계산을 가거도로 비정한 것 외에는 연구자들 간에 합의된 이름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왜 크고 작은 섬들을 산(山)이라 호명했을까? 명백히 산가늠(산을 보고 항해하는 기술) 때문이다. 망망대해 나침반 외에는 의지할 곳 없는 항해에서 마치 등대와도 같은 것이 멀고 가까운 섬들이다. 지그재그 혹은 역순이라 할지라도 도서(島嶼)의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운 바를 두고 물길을 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항해법이다.

남도인문학팁

흑산(黑山) 백산(白山) 넘어 토수양(土水洋)까지

천년 전의 이름을 밝히는 것보다 긴요한 일이 있다. 흑산 백산 넘어 월서, 난산도, 백의도, 궤섬 등에서 개성에 이르는 바다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그것이다. 검푸르렀던 바다가 이 권역에 들어오면 달라진다. 마치 중국에서 황수양, 백수양, 흑수양 따위로 호명했던 바와 같다. 서긍은 한해륙 내안(內岸)의 바다를 명명하지 않았다. 이 바다가 가진 특성에 주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해륙 내안의 바다는 모두 뻘색(土色)이요 흑산 바깥의 바다는 모두 흑색(黑色)이다. 갯벌의 뻘색은 흙색으로부터 왔다. 황하와 양쯔강에서 쏟아낸 황토가 붉은 바다를 만들었다면, 영산강, 금강, 한강, 압록강 등 실핏줄 같은 강줄기가 서해로 쏟아낸 색이 흙빛 바다를 만들었다. 이 바다를 토수양(土水洋)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천여 년 전 작명법에 기대는 호명이다. 고려도경에 언급된 대다수 섬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은 서긍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산가늠으로 항해하였던 우리네 선조들의 살림살이 공간이다. 서긍뱃길 900년 한중수교 30년의 의미를 생각한다. 내가 줄곧 주창해왔던 대대성(對待性)으로서의 갱번론과 물골론을 환기한다. 공교롭게도 이번 묘박(錨泊)의 선상에서 내 생일을 맞이했다. 흔들리는 갑판에서 축하해준 이들을 잊을 수 없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니 도반(道伴)이요, 더불어 미래를 열어갈 것이니 동지다. 고군산 선유도 먼바다에서 토수양을 가르며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다. 뭍과 물이 반복해서 대칭을 이루는 시공, 뭍의 흙과 바다의 물을 연결하는 공간이기에 해륙이고 토수양이다. 서긍 이후 천여 년, 오늘 우리 여기, 나라간 이념간 사람들의 왕래는 끊기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했다. 하지만 물골 따라 흐르는 물길은 중단된 적이 없다. 하늘땅, 뭍과 물은 여전히 흙빛바다 토수양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가슴 벌떡이고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