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장> "나무 만지며 살아온 한평생, 가장 큰 자부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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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명인·명장> "나무 만지며 살아온 한평생, 가장 큰 자부심이죠"
‘충장로의 보물’ 동구의 명인·명장을 찾아서||18. 정종구 목공예 명장||‘석공’ 아버지에 손재주 물려받아 ||전국 돌며 ‘가구조각’ 등 기술 습득 ||1981년부터 광주 민예공방 운영 ||2014년 광주시 공예명장에 선정|| “칠순엔 인생 첫 개인전 열고 싶어”
  • 입력 : 2022. 08.11(목) 17:24
  • 곽지혜 기자

정종구 목공예 명장은 "나무는 인간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친환경적인 소재"라며 "나무 만지고 산다는 것은 저에게 가장 큰 자부심이다"고 말했다.

목공예를 시작한 지 47년의 세월이 흘렀다. 말로는 그저 생계를 위해 이어온 세월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를 만지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큰 행복이자 자부심이라는 그에게 지난 세월이 생계만을 위해 걸어온 길은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광주시 공예 명장으로써 그가 말하는 '생계'는 물론, 지역사회 공예산업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는 정종구 목공예 명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종구 목공예 명장이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달을 담아낸 '일월오봉도'를 서각으로 재현한 목공예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 "전국 기술자 찾아다니며 배워"

담양에서 석공 일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정 명장은 부친의 손재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닭장을 짓고 외양간을 고치는 등 크고 작은 집안 물건들을 손수 만들고 고치며 자라왔다.

그러던 정 명장이 본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목공예 학원에 방문하면서부터다.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었던 정 명장은 진로를 생각할 때마다 본인의 장애가 항상 걸림돌처럼 여겨졌다. 우연히 방문한 목공예 학원에서 앉아서 작업하는 수강생들의 모습을 보니 이것이라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 명장은 "기술은 배워서 먹고는 살아야겠고, 목공예를 보는 순간 이거구나 싶더라"며 "다행히 손재주도 있는 편이라서 마음을 정하고 고등학교와 목공예 학원을 같이 다니면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학원을 다니며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가 되자 원장님의 소개로 당시 가구를 만들던 공작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 명장은 "거기서 기술을 좀 배우는데 일단은 잘 알려주려고 하지도 않고, 이게 사람마다 기술이 다르고 노하우가 다른데 내가 한 곳에 오래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여러 기술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워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후반 장롱 등 나무 가구에 문양을 넣는 '가구조각'이 인기를 끌며 정 명장도 가구조각을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가구조각을 전문적으로 하면서 분야나 제 기술을 크게 확장했던 것 같다"며 "금호동, 약수동, 마장동 등 각 동네를 거치며 가구조각을 하다가 1981년에 광주에 민예공방을 차리고 저만의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정종구 목공예 명장이 광주 동구에 위치한 민예공방에서 서각 작업을 하고 있다.

● "공예품도 유행과 수요에 맞춰가야"

국내 산업이 발전하고 유행이 바뀔 때마다 목공예의 트렌드도 덩달아 바뀌었다. 곧 세밀한 작업을 요하는 가구조각의 수요는 줄어들고 중후한 멋이 있는 뿌리공예 제품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정 명장은 "공예인을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도 무엇을 만들어야 내가 먹고살까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며 "당시에는 탁자 다리를 나무뿌리 모양 그대로 살린 뿌리공예가 인기를 끌며 탁자도 만들고, 장식대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장은 계속해서 변했다. 필리핀, 중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저렴한 인건비와 목자재로 만들어진 뿌리가구가 수입되기 시작하자 비싼 인건비와 국산 나무로 만들어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국내 제품들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이후에 그가 선택한 것은 목공 서각 제품들이다. 명패와 현판 등 나무에 글씨를 새기고 그림을 새긴 전통 서각을 전문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물론 공예인으로써 전통을 계승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지만, 전업 공예인으로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을 등한시할 수 없다"며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만드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그 안에서 실용적인 공예품과 더불어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시대에 걸맞게 판매 방식도 바꿨다. 직접 공방에 찾아와 주문을 하고 제품을 구매했던 시대와 달리 그는 10여년 전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며 온라인상에서 주문을 받아 제작한 서각 제품을 전국으로 보낸다.

정 명장은 "시간이 지나면 나무도 수축을 하거나 뒤틀리는 등 모양이 변한다. 하물며 인간인 제가 나이 들고 늙어가는 것은 당연하다"며 "젊어서야 힘이 있으니까 수백킬로씩 나가는 나무뿌리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동안의 노하우로 더 세밀하고 가치 있는 제품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만드는 제품은 달라지지만, 무엇을 만들든지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라지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는 나무의 성질 때문에 제품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구하는 일은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나무를 사는 것부터 건조 작업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

그는 "5년에서 약 10년까지 건조를 한다. 그래야만 비틀림이라든가 수축 등 변형을 최소한으로 잡을 수 있다"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무는 국산만 취급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정종구 목공예 명장이 광주 동구에 위치한 민예공방 작업장에서 명패 제작 과정 중 서각을 새기기 전 나무의 결을 다듬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 지역민, 장애인 대상 강의·지도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면서도 정 명장은 틈틈이 각종 공예품 대전과 기능경기대회 출전 등 경력을 쌓으며 지역사회에서 공예산업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지난 2013년에는 고용노동부 우수 숙련기술자로, 2014년에는 광주시 공예 명장으로 선정되며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았다.

정 명장은 "우리가 명성을 얻고 큰돈을 벌자고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꾸준히 나무와 함께 해온 것을 인정받고 명장으로 선정된 것은 참 보람 있는 일"이라면서도 "아쉬운 점은 우리 광주시에서 이렇게 명장들을 선정해 놓은 만큼 다방면에서 활용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부분이 많이 없어 조금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목공예 서각 교실을 운영하고, 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선수들을 지도하며 작품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정 명장은 "동구청에서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동구마루'라는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민들을 대상으로 서각 강의를 5년째 하고 있다"며 "강의를 통해서 출품도 하고 작가 대열에 올라가는 분들도 꽤 많이 있고 서각이라는 것을 주민들이 점점 더 알아가시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우수 숙련기술자로 선정되면서는 공방에서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목표로 장애인들의 지도도 맡고 있다. 지도한 선수들 중에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고 은메달 수상자도 3명 배출해냈다.

그는 "제가 가르친 제자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며 "몸은 좀 불편하지만 기능경기대회 나가서 메달도 따오고 하면 그 사람들 생활에도 정말 큰 활력이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정 명장은 끝으로 아직까지 한 번도 개최해보지 못한 개인전을 언젠가 꼭 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제 나이가 지금 예순여섯인데 칠순에는 개인전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준비를 하고 있다"며 "그동안 해왔던 가구조각과 뿌리공예, 서각까지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여줄 수 있는 자리를 갖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고 밝혔다.

정종구 목공예 명장이 초년시절 바닷가를 걷다 영감을 받아 만든 조개 모양의 작품.

곽지혜 기자 jihye.kwa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