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음악가… "임을 위한 행진곡 연주해보니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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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시위 음악가… "임을 위한 행진곡 연주해보니 감동"
미얀마 국경지대를 가다② ||바이올리니스트 ‘포산’ 시위 주도 ||1월 자택 습격 계엄군 피해 도피 ||타이어 의지 강 건너 태국에 도착 ||무국적자 제 3국 난민 이주 원해
  • 입력 : 2022. 09.05(월) 15:30
  • 도선인 기자

지난 13일 태국의 국경도시 매솟에서 머물고 있는 미얀마 바이올리니스트 포산 씨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다.

"말로만 듣던 대한민국 광주의 민주주의 혁명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하니 영광이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미얀마와 근접한 태국의 국경도시 매솟의 한 건물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전쟁 같은 미얀마를 탈출해 태국에서 은거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포산 씨는 전남일보 취재진이 내민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를 보자마자 어느새 광주의 오월을 연주해냈다.

2021년 2월 미얀마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반대시위에 바이올린을 들고 참여한 그는 현재 정권의 눈초리를 피해 태국에 머물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진 이상 미얀마는 그에게 안전한 조국이 아니다. 능숙하게 바이올린 선율을 켜내는 그의 멜로디에는 어딘지 모를 애달픔이 담겼다.

포산 씨는 연주 후 "미얀마의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음악인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곡이다. 지금의 미얀마 국민들에게도 큰 힘이 될 곡이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말하는 포산 씨. 그는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평범한 교사였다. 그러나 지난해 2월1일 전차를 앞세운 군부의 쿠데타는 그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미얀마에서는 쿠데타가 벌어지자 공무원들은 군사정권에 항의하고자 파업형태의 시민불복종운동을 시작했고 포산 씨도 이 운동에 후원금을 보탰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민주화운동 시위에 지친 시민들을 위로했다. 마치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악단과도 같은 포산 씨 일행의 연주에도 불구하고, 수천여 명이 폭력에 내몰린 양곤 거리는 매일 밤 피가 흘렀다.

그런 무자비한 시위에 맞서 포산 씨도 낡은 바이올린을 무기로 매일 밤, 거리로 나섰다. 매일 저녁이면 사망한 시민을 위한 진혼곡을 연주했고, 군인들의 무단진압에 항의하고자 분노의 선율을 켰다. 포산 씨는 "나에게는 평화적으로 시위할 권리가 있고, 예술을 통해 군사정권에 항의할 권리가 있다"며 "파업에 동참한 시민들을 위해 혁명의 노래를 연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21년 2월 미얀마 쿠데타 이후 미얀마 바이올리니스트 포산 씨가 시위 현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포산 씨가 연주하는 영상은 SNS를 통해 전 세계에 퍼졌고, 군사정권이 그를 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지난해 1월26일, 무장한 군인들이 포산 씨의 아파트 건물을 습격했다. '남자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아 건물 곳곳을 수색하는 군인들을 피해 포산 씨는 숨을 죽이며 베란다에 납작 엎드렸다.

포산 씨는 "군인들은 SNS에 올린 정치적인 게시물을 추적했다. 그때도 1층에 살던 가족들은 SNS 기록이 덜미가 돼 체포됐다"며 "함께 시위했던 학생 중 한 명도 양곤수용소에 수감돼 고문을 당했는데, 만신창이가 된 채 출소했다. 바이올린 시위를 함께 구상했던 내 친구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회상했다.

자신을 향한 체포망이 좁혀지면서 포산 씨는 이웃의 안전을 위해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포산 씨는 일주일 후 태국과 인접한 국경도시 미야와디로 향했다. 마침 먼저 국경을 넘어 태국에 도착해 있었던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이동과 임시 숙소 정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태국 국경을 넘는 과정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태국 경찰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너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SNS에서 정치적인 게시물을 삭제하는 등 흔적을 정리한 포산 씨는 대형 트럭 타이어를 구해 이를 의지해 어렵사리 강을 건넜다.

구사일생으로 태국에 온 지 어느덧 8개월이 흘렀다. 함께 강을 건너온 아내와 7살 난 딸, 두 살배기 아들 등 가족들의 삶도 지칠 대로 지쳤다.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에서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포산 씨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지금으로서는 난민 신분으로 제3국에 이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서류상 제약이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포산 씨는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있는 광주를 말하면서 도움을 호소했다. 그는 "군부가 정치 전면에 나서자 미얀마는 경제적으로 취약해졌다. 삶에 위협을 느끼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며 "미얀마 사람들은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비슷한 역사가 있는 광주만큼은 우리의 혁명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