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5> "국민을 담보로 하는 황제놀이는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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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5> "국민을 담보로 하는 황제놀이는 용서할 수 없다"
베트남 달랏!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와 호치민
  • 입력 : 2022. 09.22(목) 16:29
  • 편집에디터

바오다이의 여름별장 외관. 차노휘

유럽의 집과 건물을 자세히 보면 창 모양이 다르다. 한국의 창문 형태가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다면 유럽은 가로가 짧고 세로가 길다. 창 하나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건축 면적에 비해 창문 개수도 적다. 유럽은 건축 자재가 돌과 벽돌이 주재료이다. 이 단단한 벽이 지붕을 떠받치는 형태이다. 벽 중심의 건축물은 가로로 널찍하게 창을 내면 벽돌의 하중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창의 가로 폭을 줄이고 대신 세로로 길쭉한 창을 내게 된다. 뿐만 이런 형태의 창문 모양은 세금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창문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앙숙인 영국이 창문세를 거둬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게 꽤나 부러웠다. 그는 창문세를 도입하되 창문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는 영국과 달리 창문 폭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겼다. 긴 가로창을 내는 것은 더 많은 재료와 기술이 들어가야 해서 건축비가 비쌀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여기에 더해 건물이 도로에 면한 면적이 넓으면 세금을 더 부과했다. 사람들은 최대한 건물 정면을 좁게 하고 대신 안쪽으로 길쭉하게 집을 지었다. 건물 정면이 좁으니 창도 역시 건물에 비례해 가로로 길 수밖에 없었다. 전 프랑스 총독의 관저가 있었던 달랏에서는 유독 이런 유럽풍의 건축물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늘 연중 봄 날씨처럼 쾌청한 이곳에 지어진 베트남 마지막 황제의 바오다이의 여름 별장 또한 프랑스풍 건축물 형태를 닮았다.

체험장. 차노휘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2km 정도 거리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속에 응우옌 왕조 최후의 황제인 바오다이(1913년 10월 22일 베트남 후에에서 태어남)와 그 가족을 위한 여름 별장이 1933년에 지어졌다.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달랏 전체가 사방으로 내려다보였다. 바오다이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에는 거실, 연회실 등 모두 25개의 방이 있다. 각종 예술 작품과 골동품들 또한 전시되어 있다.

내가 그 별장에 들어서면서 현지인 가이드에게 "왜 이렇게 방이 많은 거죠?"라고 지나가듯 물었을 때, 그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래요."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했다. 바오다이 황제는 천수를 누리고 1997년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3세였다. 그는 2명의 황후와 3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공식적인 두 번째 황후이자 여섯 번째 여자였던 프랑스인 모니크 뱅 튀의 옆에서였다. 6명의 여인에게서 모두 5남 6녀의 자식을 두었다.

현지인 여행객들. 차노휘

그의 여름별장에는 마지막 길을 지켰다는 프랑스 여인인 아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던 첫 번째 황후 남프엉의 초상화가 몇 점 걸려있었다. 남프엉은 실제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 온 엘리트였다. 바오다이가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해 결혼했고 그들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다지만 결국에는 바오다이에게 버림받았다. 그는 한 여자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 유학 및 프랑스 감시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술과 여자에만 탐닉한 그에게 그 당시 동정여론이 많았다. 그렇게 무능한 인물이 아닌데도 식민지 치하에서는 허수아비 군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호치민이 이끈 독립군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1945년 9월 2일), 프랑스의 잔재세력이 남쪽을 차지하고는 북베트남과 9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마침내 북베트남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였다. 그는 더 이상 남쪽에서도 프랑스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1955년 국민들로부터 황제 퇴위를 당하고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더 이상 그를 국민들이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체험장. 차노휘

하늘이 베트남을 버리지 않았는지 꼭두각시 황제들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현재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되고 있는 영웅이 두각을 드러낸다. 그는 프랑스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이끌어낸 호치민이다. 독립을 했지만 강국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5~1954)도 모자라 베트남 전쟁(1955~1975)까지 연달아 치러야 했다. 호치민이 사망(1969)한 뒤 6년 뒤에야 남과 북으로 나뉘었던 베트남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호치민의 사후에도 남쪽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호치민으로 바꾸는 등,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했던 것이다.

같은 하늘에 함께 숨을 쉬었을 두 사람. 조국이 식민지든 전쟁에 휘말리든 사치를 부리며 호사스럽게 생활했던 한 남자(바오다이는 1952년 미국에서는 베트남 국가 예산 5%에 달하는 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며 호화스럽게 생활했다. 그를 두고 스위스 및 프랑스 은행에 상당수 돈을 숨기고 있다고도 했다)와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외쳤던 다른 남자. 그리고 그 남자는 1945년 9월 2일에 이렇게 외쳤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나는 바오다이의 별장 한 쪽에 마련된 황실 복장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체험장을 바라보면서 호치민이 작성했던 베트남 독립 선언문을 떠올려봤다. 우리나라 또한 베트남의 역사와 비슷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기에 과거의 불행이 미래에 되풀이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더 이상 국민들의 삶의 터전을 담보로 하는 황제놀이는 그래서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놀이'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는 생사가 걸린 '전쟁'인 것이다. 바오다이는 1955년 국민들로부터 퇴위를 당하고 베트남을 떠나면서 이렇게 한 마디를 남긴다. "이제서야 지겨운 허수아비 생활을 마감하는군, 30년이나 걸렸어."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