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칭록(循稱錄)과 남도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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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순칭록(循稱錄)과 남도풍속
  • 입력 : 2018. 11.21(수) 13:18
  • 편집에디터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출상 장면(1982. 6. 1 설진석 조모상)-사진제공 설진석

장례는 축제일까?

꽹과리를 울리고 북을 치며 큰 소리로 노래를 한다. 사람들은 뒤따르며 땅에 발을 구르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막걸리와 소주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가 하면 질펀한 웃음들과 진한 농담들이 오간다. 한편의 축제장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앞자리에 상여가 있고 긴 베를 잡고 가는 소복의 여인들이 있다. 뒤따르는 한 무리의 상주들이 있다. 웃고 떠드는 무리들 속에 간간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던 까닭이 여기 있었구나. 어디서 보았음직한 풍경들. 그렇다. 현행되고 있는 진도지역의 장례행렬 풍경이다. 근자에는 흘러간 유행가를 제창하기도 하고 수입한 춤을 추기도 한다. 나는 이를 주목하여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라는 책을 썼다. 장례가 죽음을 슬퍼하는 의례가 아니라 어떤 곳에서 다시 태어날 이른바 '거듭남'을 축하하고 추모하는 축제라는 의미다. <진도의 재생의례>라는 부제를 단 이유가 여기 있는데, 대중 일반에게는 보편적인 인식이 아니기에 차차 논증할 기회를 만들어보려 한다.

북치고 노래하며, 울긋불긋 치장하는 상여행렬

"상여 나갈 때 북을 치며 앞에서 인도하고 큰소리로 울며 뒤에 따라가는 것은 결코 오랑캐의 풍속이다." 누구 말일까? 진도에 유배 왔던 유와 김이익이 남도의 풍속을 보고 개탄한 내용이다. "의관을 갖춘 집안에서 차마 이런 풍습을 본받겠는가?"라고 토로한다. "애경사와 관계된 일은 더더욱 반상의 구별이 있어야 마땅하다"고도 말한다. 이 지적을 통해 역설적으로 얻게 되는 정보들이 있다. 당시 진도의 평민들은 상여가 나갈 때 북을 치며 앞에서 인도하고 큰소리로 울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중앙관료들 혹은 내륙 일반의 조선사회에서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폄하했음도 알 수 있다. 김이익의 지적은 이어진다. "또 향상, 교의, 등롱은 앞에, 만장과 '삽선(翣扇)'은 좌우에 있는데 이는 의장물이다. 들고 있는 사람과 상여꾼은 필히 머리에 건을 써야 하고, 상여 위에 채색을 꽂는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당시 진도지역의 상여가 울긋불긋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사진 참고). 아마도 어떤 무리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상것들이 행하는) 짓거리'정도로 폄하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김이익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오랑캐적인 남도(진도를 포함한 남녘지역으로 확대해석해도 무방하다)지역의 풍속을 개화시키기 위해 '순칭록'이라는 저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칭록 저술 배경과 진도 풍속의 면모

"우리 성상께서 등극하여 5년이 된 을축년(1805)은 내가 벌을 받고 이곳으로 유배 온지 6년이 되는 해이다. 이곳 진도에서 오래 있었기에 이 지역 풍습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대부분 하나 같이 그릇되어 개탄스럽고 매우 나쁘게 여겼으나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어 항상 근심할 뿐이었다. 하루는 갑자기 고을에서 인망(人望)이 두터운 박진종(朴震琮) 후옥(厚玉)군이 나에게 사례(四禮) 의절(儀節)에 대해 질문하면서 '가르침을 주시어 저희가 의절에 대해 깨닫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지목한 것처럼 『순칭록』은 진도의 문하생 박진종의 요청에 따라 진도 유배 6년에 김이익이 저술한 의례 지침서다. 고을 풍습 중 크게 잘못이 아닌 것은 제외하고 옛 것을 따르라고 하면서도 사례(四禮)에 기록된 성인들의 말씀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고 온 고을 선사(善士)와 같은 집안 친척들이 익혀서 행한다면 성세(聖世)의 풍속으로 교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다. 문답 내용을 대화체 서문으로 쓰고 있다. 김이익의 진도 풍속에 대한 시선이나 관점은 물론 당시 지배세력의 문화적 지향이나 지점들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저술이다. 장례뿐만 아니라 혼례, 상례 등 사례편람에 속하는 남도의 풍속들에 대해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하지만 김이익의 소망대로 진도의 풍속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70여 년 후인 1873년 소치 허련이 진도군수에게 건의한 변속팔조에도 '거전타고(擧前打鼓)를 금하라'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상여 앞에서 북을 치는 것을 금하라는 뜻이다. 이후 오늘에 이르러 상여 앞에서 북치고 노래하며 춤추는 풍속은 전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무슨 뜻일까? 중앙 혹은 내륙 지역들과는 다른 풍속이 매우 오랫동안 진도 혹은 남도지역에 전승되어 왔다는 말이다. 사실 이 풍속은 수서 동이전 고구려조의 기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례를 하면 곧 북을 치고 춤추며 노래 부르는 가운데 주검을 묘지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들은 지면을 달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이익의 진도 유배와 집필생활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된다. 친정세력인 벽파(僻派)가 안동 김씨 중심의 시파(時派)를 견제하면서 진도 금갑도로 유배된 것이 김이익 일생의 세 번째 유배다. 순조 즉위년 1800년이다. 여러 저술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배생활의 억울함을 주로 집필생활을 통해 해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이익은 6동 동안의 진도 유배 생활을 하면서 40여 책의 많은 저술을 남긴다. 유배지 금갑도는 수군만호가 주둔하는 진(鎭)으로, 지금의 의신면 금갑리에 일부 성터가 남아있다. 1801년 주역을 필사하는 것을 비롯해 1804년 금강유경편 집필까지 해마다 집필에 몰두한다. 시조 50수를 수록한

'금강영언록(金剛永言錄)', 유배 시기의 글 40여 편을 모은 가사집 '금강중용도가(金剛中庸圖歌)'등이 대표적이다. 순칭록은 1805년 유배 마지막 해에 집필하게 된다. 서문은 1805년 6월에 작성되었다. 그 뒤 진도지역의 문장가인 강재(康齋) 박진원(朴晋遠)(1860~1932)이 교정하고 떨어져 나간 곳을 보완하여 1928년 '가정절검(家庭節儉)'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순칭록이다. 본문 첫 장에 "가정절검(家庭節儉)"으로 내제를 표기하고 있다. '순칭록(循稱錄)'은 지난 1993년에 진도문화원에서 원문을 영인하여 소개한바 있다.

순칭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진도와 진도사람들'이란 책을 집필했던 박병술에 의하면 진도에 유배한 문인들 중 소재 노수신, 유와 김이익, 무정 정만조를 으뜸으로 꼽는다. 이들이 진도 유배 기간 중에 집필한 방대한 양의 저술은 물론 내용면에서도 백미를 이루기 때문이다. 나 또한 진도와 남도의 풍속을 논할 때 무정 정만조의 은파유필을 자주 인용하고, 노수신, 김이익, 정만조를 진도 유배 삼걸로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만조가 한말의 대표적인 친일 유학자라는 점은 명확히 해둔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쓴 일제강점기 동안의 방대한 책들을 자료의 소중함 때문에 취하는 것이지 그들을 존경하거나 닮기 위함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와 김이익의 순칭록(循稱錄)도 진도 풍속의 개화를 목적으로 쓴 저술이라는 점에서 나의 이 관점은 명확하다. 김이익이 시종 '남도'로 표현하는 범주의 지역 풍속 중 다른 지역과 변별되는 점들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다. 200여 년 전의 진도지역 풍속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만 주목해도 그 의미는 충분하다. 유배 후 승승장구했던 행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김이익은 조선후기 중앙집권세력의 핵심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성세(聖世)의 문화 곧 왕조 중심의 문화가 사례의 근간이라 여기고 실천했던 사람이다. 유배 섬 중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던 진도의 기층문화가 이와 달랐을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를 "가엾고 병폐로 여겨" "풍속으로 교화"하고자 쓴 책이 순칭록임을 서문에서 밝히지 않았는가. "말한 사람은 적임자가 아니라 부끄럽지만"이라는 대목으로 보면 중앙과는 다른 진도의 기층문화를 인정하는 측면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진도의 풍속을 바라봤다는 점은 부동의 사실이다. 진도사람들의 이에 대한 실천과는 별개로 오늘날 순칭록을 어떤 시선으로 해석해야 하는가의 관점은 비교적 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이익의 순칭록에서 얻는 교훈은, 어떤 시대, 어떤 지방 혹은 어떤 나라의 풍속을 교화하거나 개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진도 내에서 박진종과 소치 허련 등이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진도의 풍속을 '개화'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결국 문화란 주체적 수용자들과 창의적인 집단들에 의해 상속되고 혹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 새삼 생각하게 해준다.



남도인문학 팁

김이익의 생애

김이익(金履翼)(1743~183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보숙(輔叔), 호는 유와(牖窩), 시호는 간헌(簡獻)이다. 증조부 김창업(金昌業)이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이고, 할아버지는 김우겸(金祐謙)이다. 곧 김이익의 고조부가 김수항이다. 아버지는 김유행(金由行)이고, 어머니는 이덕영(李德英)의 딸이다. 1777년 35세로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1785년(정조 9) 43세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한다. 1788년 교리가 되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탄핵하다가 이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장령(掌令),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 등을 거쳐 1793년(정조 17)에 안동부사가 되었다. 안동부사 재직시 형벌로 백성이 죽은 사건 때문에 유배되었다. 형벌이 과다하다는 안동 사람들의 소청에 따른 것이다. 이듬해 이조참의와 대사간을 지내고 1795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99년에는 호조참판에 올라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가 득세하자 시파로 지목되어 대왕대비(사도세자의 비 헌경왕후)에 의해 진도 금갑도로 유배되었다. 1801년 11월 12일 천극(栫棘)에 처해졌다. 탱자나무로 가시 울타리를 집밖에 치는 위리안치를 말한다. 안동김씨가 집권하자 1805년 7월 26일 유배에 풀려나 진도를 떠난다. 진도유배에서 풀려난 후 공조판서, 병조판서, 수원부 유수, 대사헌, 형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대호군으로 치사하는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가담하여 권세를 누렸다. 1830년 88세로 타계하였다.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꽃상여와 오색 지전(1982. 6. 1 설진석 조모상)-사진제공 설진석

진도군 임회면 상만마을의 상여운구-사진 이또아비토, 1972

순칭록 중 상여행렬을 나타낸 도식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